영어 글자와 소리의 관계가 불규칙하게 된 이유
영어 글자와 소리의 불규칙적 관계는 악명이 높다. 왜 영어는 글자와 소리의 관계가 불규칙할까? 왜 한글처럼 규칙적이지 않을까? 사실 여기에는 숨은 역사적 이유들이 있다.
이런 역사적 이유들은 현재의 한글과 영어 알파벳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둘 다 자음과 모음을 갖춘 같은 종류의 소리글자 같지만 자음과 모음이 정렬된 방식은 얼핏 봐도 다른 것이 역역하다.
한글은 자음체계와 모음체계가 분명하게 따로 구분되어 있다. 자음체계에도 단자음과 겹자음과 겹받침이 있고, 모음체계에도 단모음과 겹모음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상당히 쉽고 체계적이다.
반면, 영어 알파벳이 정열된 순서는 어떠한가? 한글처럼 자음과 모음은 있으나, 한글과 다르게 자모는 구분되어있지 않다. 한 체계 안에 섞여서 26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다. 이 체계 안에서 모음 5개는 1)한데 모아놓여 있지 않고, 2) 그냥 이유를 직관적으로 알 수 없는 자리에 흩어져 있다.
한글의 정렬방식과 알파벳의 정렬순서가 다른 것은 문자를 생성하는 서로 다른 원칙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모든 언어에는 문자를 만들 때 혹은 만들어질 때 각각 고수하는 원칙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일부러 정했든 아니든 원칙은 없을 수 없다. 이 원칙에는 우선으로 여기는 방식을 반영한다. 한글과 영어 알파벳도 각기 다른 접근방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를까?
정확성 accuracy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글창제는 기원전 3000년 즈음 한반도에 한인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소리로만 존재했던 말에 글자를 붙여주는 역사적인 작업이었다. 소리 먼저, 글자 나중! 이것을 주관한 세종대왕에게는 철저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소리 하나에 글자 하나를 대응해서 만든다는 '일대일 대응'의 원칙이다. 소리 하나에 정확하게 글자 하나가 똑 떨어지도록 하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었다. 정확성 accuracy! 이것이 한글창제에 사용된 기본적인 접근방식이다.
이것을 위해 세종대왕은 전국에 나도는 소리를 전부 모아서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고, 그것을 또 작은 단위의 소리로 분석하여, 소리마다 대응하는 글자를 따로 만들었다. 그 결과로 자음과 모음을 따로 분리하여, 각각 깔끔하고 논리적으로 정렬된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자음의 경우, 단자음 14개를 기준으로, 소리가 되게 나는 겹자음을 5개 첨가하였고, 받침도 소리값이 같으면 문자를 달리 표기해서 구분을 해 주었다. (단자음 14개, 겹자음 5개, 받침자음 11개)
모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모음 10개를 기준으로 해서 두 개의 소리가 겹쳐서 나는 것도 구분하여 다 따로 하나의 소리로 쳐서 11개의 겹모음을 만들어 주었다. (단모음 10개, 겹모음 11개)
진심 친절하고 배려 깊은 글자 창제의 원칙이다. 백성을 위한 글자라서 그렇다. 복잡하지 않고 정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에 목숨을 건 것이 절절히 느껴진다. 처음부터 예외도 없었고, 애매하게 중복하여 쓰는 것도 거의 없었다. 언제나 정확하게 하나에 하나로 쓸 준비가 되어있다. 글자 하나하나하나가 꼭 레고 블록 같다.
예측성 predictability
세종대왕이 가치를 두고 있는 또 하나의 창제원칙은 예측성이었다. 이것은 한글의 글자 조합규칙에서 잘 나타난다. 글자조합은 무조건 한 글자 조합부터 시작한다. 한 글자를 조합하는 규칙은 거의 기계적이다. 따라서 예측가능성이 오백퍼센트이다.
모든 단어는 하나의 자음으로 시작한다. /ㅂ/ 겹자음도 하나의 자음이다. /ㅃ/ 이응도 자음이다. /ㅇ/
자음 뒤에 반드시 모음이 와야 한다. 꼭 와야 한다. /바/ 겹모음도 하나의 모음이다. /빼/ /예/
그 모음 뒤에 자음이 받침으로 올 수 있다. /방/ 겹자음 ㄲ, ㅆ도 받침이 될 수 있다. /뺐/ 받침자음도 온다. /앎/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규칙을 따라하면 틀릴 수가 없다. 앞에 온 것 다음에 무엇이 올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도 모음으로 시작하거나, 자음 뒤에 또 자음을 두거나, 모음 뒤에 또 모음을 두거나, 모음이 받침으로 삼지 않는다. 이런 조합은 상상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자음과 모음 (+ 자음) 조합의 방향도 정해져 있다. 모음의 형태에 따라서 세 방향으로 정해졌다. 옆으로 /거/, 아래로 /구/ , 아래옆 /궤/ 으로! 이것이 전부다. 한 모음이 다음 자음을 옆에도 둘 수 있고, 아래로 둘 수 있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
단어조합은 더 기계적일 만큼 예측가능성이 높다. 한 글자 한 단어부터 시작한다. 두 글자 모여서 한 단어가 된다. 한 글자를 붙일 수 있을 만큼 단어가 된다. 자음 모음조합과정은 물론 단어조합과정까지 레고블록을 조합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규칙만 알면, 예측이 백분 가능하다.
눈: 한 글자 한 단어
눈길: 한 글자가 두 개 모여서 두 글자 한 단어
눈사람: 한 단어 한 글자가 세 개 모여서 세 글자 한 단어
한글의 정확성과 예측성은 하나도 안 변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 창제의 두 가지 원칙은 역사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리와 글자의 일대일 대응의 정확성은 여전하다. 자모음의 조합과 단어조합을 예측할 수 있는 예측성도 변하지 않았다. 이 정확성과 예측성에 근거하여 창제된 한글!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자모음 글자 몇 개 빠진 것 이외에는 변할 수도 없었다고 본다. 규칙성이 초강력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규칙에 따라서 배우면 도대체 어려울 수도 없고 안 배워질 수도 없다. 한글을 배우는 것은 여기까지는 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알파벳 배우는 것보다 영어 원어민이 한글 배우는 것이 훨씬 쉽다.
공표된 원칙은 없다
영어 알파벳은 한글과 사정이 아주 다르다. 한글처럼 한 사람이 한 시대에 한꺼번에 특정 원칙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영어 알파벳은 '빌린' 글자이다.
1) 알파벳은 빌리기 전에도 이미 1500년 정도 진화해 왔다. 페니키안 알파벳에서, 그리스 알파벳으로, 로마 알파벳으로, 그런 다음 고대 영어 알파벳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빌리기 이전에 이미 문자생성의 원칙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2) 빌린 후에도 약 1000년에 걸쳐서 진화해 온 글자이다. 고대영어 알파벳에서, 중세영어 알파벳으로, 그리고 근대영어 알파벳을 지나면서 현재 모습의 알파벳으로 진화했다. 빌린 후에도 그 원칙은 지속되었다.
이 진화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자음보다는 모음의 진화이다. 알파벳 모음의 역사는 깊다. 우여곡절이 많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
유연성 flexibility
최초의 페니키안의 알파벳에는 자음만 있었다. 기원전 1050년 즈음 페니키아인들이 만든 최초의 알파벳에는 22개 자음만 있었다. 이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자음은 아래에서 보듯이 그림이나 상징같이 생겼다. 이런 자음만으로도 핵심적인 뜻을 전달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자음은 그리스, 로마, 고대영어, 중세영어, 그리고 현대영어에 이르기까지 자음 알파벳의 모양과 순서는 진화했지만, 소리와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규칙적으로 유지해 왔다.
주목할만한 것은 모음의 역할이다. 페니키안 알파벳에서 모음은 소리로만 존재했다. 소리로만 부수적인 역할만 한다. 자음 뒤에서, 자음과 자음 사이에서, 자음과 연관 지어 살짝살짝 밀어 넣듯 사용한다. 특히 같은 자음이라도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서 모음소리만 바꾸어도 의미가 바뀐다. 이때 사용된 모음소리는 겨우 3가지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모음을 글자로 고정해 놓지 않고 최소의 소리를 바꾸어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유연성을 극대화시킨다. 유연성! 페니키안인들이 알파벳 만들 때 지킨 원칙이었던 것이다.
적용성 adaptability
그리스인의 알파벳부터 모음이 시작되었다. 그리인들은 페니키아의 알파벳을 빌려 쓴 최초의 유럽인이다. 이들은 페니키안인 조상과는 달리 모음에도 관심이 컸다. 모음을 나타내는 글자가 필요했다. 우선, 페니키안 알파벳 중 5개 자음을 모음으로 '바꾸어 썼다'. 이 5개 자음들은 그리스어 알바펫 체계에서 자음으로 쓰기에는 소리가 약했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들이다. 이것을 버리지 않고 모음으로 바꾸어 쓴 것이다 (노랑).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5개의 모음을 위해 굳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 "이제부터 페니키안 애들이 썼던 자음 5개는 이제부터 모음 A, E, I, O, Y이다! 이렇게 쉽게 자음이 모음으로 변할 수 있다니! 이유는 간단하다. 페니키안인들이 그림 같은 글자에 자음을 입혀 사용했듯이 같은 글자에 '자의적으로' 다른 모음 소리를 넣어 사용했던 것이다. 언어를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적용성의 가치에 근거한 원칙이다. (새로 만든 모음 2개 있음-흐린 노란색: 현대 그리스어에만 계승)
전통으로 정착되는 유연성과 적용성
페니키안 알파벳의 유연성과 적용성의 원칙은 자모음 24개 한 세트로 형성된 그리스 알파벳에 담겨 전수된다. 그리스인들은 세종대왕처럼 자모음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파벳 체계 속에서 모음만 따로 모아 재배치하지도 않았다. 가장 널리 쓰던 문자 순서를 바꾸지 않고 페니키안 조상의 전통을 지켜주었다. 동시에 이것으로 자음 뒤에 모음이 온다는 자신들의 새로운 전통을 반영했다. 마찬가지로 같은 원칙이 로마도 자모 26개 알파벳 한 세트로 진화하면서, 고대영어의 자모 24개 알파벳 한 세트로 진화하면서 계속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영어 알파벳이 정렬된 순서에도 페니키안의 유연성과 그리스인의 적용성의 원칙이 담겨 있다. 반드시 외워야 할 규칙은 없었다. 이 정렬순서가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연스러우면 된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면, 한글의 정렬순서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만큼 자연스러우면 된다. 단지 한글처럼 딱딱 떨어지는 정확성과 예측성이 주는 규칙의 맛대신 우연히 모여 우연한 소리들에 적응해 온 유연함이 느껴지면 더욱 좋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콘텐츠아트 진에게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