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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Feb 07. 2022

어르신 느티나무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라고!

- 사노 요코, 『나는 고양이라고!』, 시공주니어    


 

 어떤 순간에도 자신은 고양이라고 꿋꿋하게 외치는 고양이가 있다. 유난히 고등어를 좋아하는 고양이로서, 사노 요코의 《나는 고양이라고!》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낮에도 고등어를 먹어놓고는,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고등어를 먹어볼까?” 라고 한다. 그러니 그날 아침에도, 전날에도 고등어를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양이는 숲을 산책하면서도 내내 고등어 생각뿐이다. 그런데 툭, 하고 모자에 뭔가가 떨어졌다. 다름 아닌 고등어였다.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흔들며 뒤돌아보는 고양이는 깜짝 놀란다. 고등어들이 떼로 몰려오면서 자신을 공격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어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네가 고등어를 먹었지?”라고 노래 부르며 고양이를 계속 쫓아왔다. 그런 속에서도 고양이는 “당연하잖아? 나는 고양이라고!” 하면서 시내로 도망친다. 지친 고양이가 쉬고 싶어서 영화관으로 들어가 한숨을 돌리는데 이게 웬일인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고등어였다.

  

겁에 질린 고양이는 다시 숲 속으로 뛰어간다. 그러면서도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라고!”를 여전히 반복한다. 다음엔 커다란 나무 기둥을 붙들고 이렇게 외친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라고!

  

  

그 정도면 고등어는 이제 안 먹겠다고 할 법도 하건만, 고양이는 숨을 헉헉대며 절규하듯 그리 외쳐댄 것이다. 그러고 났는데 숲이 예전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고양이는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그럼,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고등어를 먹어볼까?”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고양이, 그 정도로 고등어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의지가 강한 것인지 헷갈리지만 단호한 고양이의 말이 나를 찌르고 흔들었다. 나라면 아무리 좋아하는 것일지라도 그 상황이라면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말 것이다. 비슷한 삼치를 먹으면 되잖은가. 하지만 고양이는 확고했다. 자신은 생선을 먹어야 하는 고양이이고, 그중 고등어를 먹을 것이라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자리가 적지 않았는데 과연 나는 나를 누구라고 말했던가.


책 블로그를 하고 있어서 이미지 사진을 올려야 되는데, 아무리 책 사진이어도 이왕이면 잘 찍고 싶어서 배우기로 했습니다.(사진 아카데미에서)   

  

20여 년 전에 TV에서 우연히 명창을 주인공으로 한 휴먼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처음 들은 판소리가 제 가슴을 크게 울려서 언젠가는 꼭 배우고 싶었습니다.(판소리 교실에서)   

  

오랫동안 청소년 대상으로 사고력 독서 관련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장르보다 그림책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중년이 되면 그림책으로 성인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심리에도 관심이 많아 검색하던 중 이 강의가 눈에 띄어 신청하게 되었습니다.(그림책 심리학 강의실에서)  

   

신영복 선생의 저서를 읽으면서 선생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고 혹시 일반인들도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있을까 해서 선생이 재직하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화대학원의 커리큘럼이 제 관심을 끌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MT에서)

    

판소리를 배우면서 발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용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한국무용 교실에서)     

  


대략 5가지만 적어보았는데 배우는 걸 좋아하다 보니 주로 강의실이나 교실에서 말한 것들이다. 나란 사람은 하나지만 나를 소개하는 내용은 장소마다 이렇듯 다르다. 그런데 나를 명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신청 사유에 대한 것들이다. 물론 다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제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정체성 말고, 오롯이 내 삶 앞에서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다시 짚어보기로 했다. 나도 고양이처럼 망설이지 않고 지체 없이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고등어 떼에게 습격당하는 그림을 보면서, 만약 내가 고양이라면 그 뒤에서 수많은 책들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책들은, “네가 책을 먹었지? 그렇지?” 하면서 외쳐댈 것이다. 평상시는 물론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도, 무언가를 해야 될 때에도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책이니까. 지금 역시 책을 업고 문장을 뽑아 들고 그것들과 함께 걷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먹은 것도 책이고, 가장 맛있는 것도 책이다.

  

수많은 책들에게 함몰되고, 뛰어난 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설득당하며 지나온 날들이 꼭 고양이가 고등어에게 쫓기는 모습과도 같다. 책을 밖으로 들고 나와 길을 걷는 것도 거기에서 한 발 나오기 위한 몸짓이기도 하다. 책 안에서 가져온 문장이지만 걷는 동안 그 내용을 음미하면서 내 삶이라는 체로 걸러내 나를 새롭게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출발점에 서 있는 어르신 느티나무와 많이 닮은 그림엽서 뒷면에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라고!’라는 문장을 써서 집을 나섰다. 책은 가방에 넣었다.



  




느티나무 앞에 서서 그것들을 꺼내 느티나무에게 보여주었다. 지난주만 해도 잎이 전혀 없던 가지에 여린 잎들이 제법 나와 있었다. 그리고 늠름한 자태로 서 있는 느티나무에게 물었다.

 

 “어르신,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오래 사셨으니 우리 인간보다 훨씬 많은 지혜를 갖고 계시지요? 그걸 제게도 나누어 주세요.”

  

귀를 기울이며 몇 바퀴를 돌자, 드디어 느티나무가 낮은 목소리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네. 내 가지들을 보게나. 햇볕이 많이 닿는 곳은 더 빨리 잎이 나오고, 그렇지 않은 곳은 아직 나오지 않은 곳도 있다네. 지금 이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 해도 그게 전부 나일세. 나는 그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한다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것까지도 받아들인다네. 그저 묵묵히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가장 나다움을 만들어가지.”

  

느티나무의 답을 들은 나는 가방과 책을 챙겨 서둘러 출발했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일었다. 먼지를 가득 품은 바람이 길을 메우고 있어 잠시 기다렸지만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서 걸었다.

  

바람은 계속 불었고, 날은 흐렸다. 중간에 잠시 햇살이 나왔지만 흐린 날씨가 계속되어 걷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엽서에 적어간 문장에 대한 정리는 1코스에서 거의 마무리되었다.

  

고등어를 좋아하는 고양이식으로 말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 자연, 걷기이다. 이 세 가지를 다 아우르고 있는 것이 바로 상록 오색길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 책을 업고 문장을 들고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고등어를 보는 순간 두 눈이 번쩍이고 털이 설 정도로 행복해하는 고양이처럼, 나 역시 이 길을 걷는 날은 심장이 뛰고 설렌다.

  

그렇다면 삶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마음이 하는 말을 잘 따르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사는 나무들의 느긋함을 갖기는 어렵겠지만, 400년도 더 산  느티나무의 자세는 평생 배우고 싶다. 받아들이고, 내려놓고, 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묘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상징적인 묘비명으로 이런 내용이면 좋겠다.      


'자기다움을 찾은 사람.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활기찬 삶을 살다 가다.'


- 202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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