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
길가에서 아이들을 보며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참 어설플만치 귀엽다 생각했다. 저 짧은 팔을 끝까지 다 들어서 엄마 아빠 손을 잡겠다고 하는 모습. 괜스레 내 어깨가 아팠다. 목 뒤로 이어지는 뭉친 어깨 근육을 문지르면서 오래전 그즈음을 떠올렸다.
성인의 나이를 통과한 지 겨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였을까. 세상을 배워야 할 것들과 배우지 않아도 될 것들로 어렴풋이 나누던 시절,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는 당혹스러웠다. 전공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회로 입장시키는 편도 티켓이 아니라 좀 더 고차원의 효율을 위한, 그러니까 존재론적인 한계를 빌미로 강요받은 선택이라는 기분 때문이었다. 청소년기의 자그만 불꽃만으로는 세상을 덥힐 수 없다는 자조에 자신을 무지한 인간으로 두진 않겠다는 목소리의 떨림도 섞였을 것이다.
당황스러운 자각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보고자 - 지금에서야 안 일이지만 - 모방을 서슴없이 해내고 있을 때, 무지의 영역 그러니까 언젠가는 배워야 할 대상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한 앎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직관이라 해야 할 정도였다. 이때껏 이성의 장막 뒤로 몰아넣었던 목소리에게 무심결에 익숙한 대답을 건냈다. 그러자 시답잖은 속삭임이 내면에서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일기 좀 잘 썼으면, 좀 좋아.' 정말 그랬을까. 억지로라도 '좋았었다, 재밌었다'로 끝나는 일기를 남겼다면, 아이들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었을까.
아이의 웃음소리에 가로수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리가 아팠던 걸까. 아빠에게 폴짝 뛰어 안기는 아이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다른 손을 들어 반대편을 주무르면서 생각했다. 당혹감은 무엇을 버렸는지도 모르는 확실한 망각이 찾아오기 전에 되찾을 기회를 알리러 오는 신호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