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시간은 너무 빠르다. 난 그 사실을 문득문득 느낀다. 어릴 때 다녔던 학교 근처를 지날 때, 회사 동기들이랑 신입 시절 이야기를 할 때, 동생이랑 손 붙잡고 찍은 사진을 볼 때. 그럴 때마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오랫동안 쓰지 않은 메일 주소 하나가 생각났다. 그 메일을 다시 들어가 볼 수 있을지 궁금해서 여러 인증 절차를 거친 뒤 로그인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때 처음 만들었던 메일이라 그런지 지금은 쓰지 않는 유치한 말투 가득한 편지함이 보였다. 이름과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 편지도 있었고, 많이 따르고 좋아했던 선생님과 주고받은 메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유독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우리 아빠였다.
제목 : 엊그제
참 시간은 물처럼 빠르구나..
아빠 나이도 벌써 사십이라니..
너도 1997년 이 맘때즘에는 입학식에 갔지..
이제 너도 5학년이 되는구나.
초등학생의 맏누나를 코앞에 둔 그런 임무를 띈..
암튼 축하한다..
20년도 넘은 메일. 시간이 지나면 변해버리는 편지와는 다르게 빛도 그대로였다. 시간은 물처럼 빠르다며 곧 마흔이 된다던 아빠는 이제 환갑이 되었다.
"아빠, 시간 참 빠르다. 초등학생 때가 엊그제 같아."
시간이 빠르다는 내 말에 아빠는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게. 시간 빠르지. 아빠는 아빠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엊그제 같아. 지금도 눈 감으면 손에 잡힐 거 같이 선명해. 아주 선명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빠 대답에 울컥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아빠랑 엄마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어른이 아니었다는 걸.
아빠는 1960년대 초반 오 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큰 고모, 작은 고모, 큰 아빠, 우리 아빠, 작은 아빠 순서다. 아빠는 대화할 때 거의 모든 걸 내 입장에서 설명해 주었다. 본인 입장에서 엄마, 아빠, 누나, 형인데도, 나와 대화할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큰 아빠라고 표현해 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몇 년 전 모두 돌아가셨다.
나: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많아?
아빠: 할아버지 직업이 목수였던 것은 알고 있지? 정말 뭐든지 다 만들 수 있는 분이었어. 당시에 아빠는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살고 있었는데, 누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가구가 필요하잖아?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할아버지 목공소로 찾아와서 장롱을 주문하고 그랬어.
나: 그럼 할아버지가 혼자 장롱을 만드는 거야?
아빠: 그지. 주문이 있으면 나무를 사고,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이런 일을 하셨어. 약간 생소하지? 할아버지는 성격이 느긋하고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분이셔서 목공소가 아주 잘 되진 않았어. 덕분에 가정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 그런데 할머니는 도전 의식이 강한 분이잖아. 그래서 할머니가 돈 벌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한 거야. 큰 고모랑 할머니 둘이, 말하자면 선발대로 먼저 올라가셨지.
나: 정말? 근데 그때 큰 고모도 중학생일 때 아니야?
아빠: 그랬을 거야. 근데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으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서울로 가게 된 거지. 할머니랑 큰 고모는 처음부터 서울로 가진 못했고 전남에 있는 고아원에 갔어. 거기서 원생들 식사 조리하고 돌보는 일을 하셨어. 그리고 우리 삼 형제를 그 고아원에 데려갔어. 혹시 예전에 아빠랑 그 고아원 갔던 거 기억나? 너랑 정훈(남동생)이 모두 그 고아원에 데려간 적이 있었거든.
나: 기억 안 나. 그럼 아빠 고아원에서 지낸 거야?
아빠: 그래. 큰 고모랑 할머니는 거기서 일하고, 삼 형제는 원생들이랑 똑같이 지냈지. 작은 고모랑 할아버지는 고향에 남았고. 아빠가 고아원에 갈 즈음이 이제 막 초등학교 입학할 시기였는데, 그러고는 한동안 그 고아원에서 살았던 것 같아. 나랑 형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누나는 중학교 다니면서 할머니를 돕고.
나에게 고아원은 정말 '고아'원 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거나 부모님에게 버림받아서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고아원 아닌가? 그런데 아빠가 어린 시절 얼마나 가난했으면 할머니와 함께 고아원에서 지내야 했을까? 그곳에서의 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거란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아빠: 다른 고아원 아이들처럼 똑같이 지냈어. 단체 생활이었지. 회사 식당에서 밥 먹듯이 밥 먹고, 몇 명씩 같이 자고. 군대 같았어. 각자 해야 되는 일도 있지. 아,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고아원 안에서 물건이 없어진 거야. 그래서 애들을 속옷 차림으로 운동장에 세워 놓고 자수할 때까지 벌을 세웠던 기억이 있어. 나도 예외 없이 밖에 서 있었어.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러웠어. 잘못도 없는데 너무 춥고 힘이 들었지.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까지 했는데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어. 여하튼, 자는 시간도 정해져 있고, 그것 말고도 정해진 게 굉장히 많았어.
나: 어떤 것들이 정해져 있었는데?
아빠: 기상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아침에는 일어나서 청소를 해야 해. 심지어 각자 청소 구역도 다 정해져 있었어. 청소할 때마다 똑같은 노래가 나왔어.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라는 노래.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했었지. 서울은 어떨까? 서울도 아닌데 왜 이 노래를 틀었을까? 서울이 그렇게 좋을까?
나: 고아원에서 지내다 보면 힘든 일도 많았을 것 같아.
아빠: 학교에서 애들이랑 잘 섞이지 못했던 것 같아. 애들이 날 보는 시선이 느껴졌거든. ‘쟤 고아원에서 온 애야.’하는 소리도 들었고. 그런데 우스운 건 고아원 안에서는 고아가 아니라고 또 따돌림당했어. ‘쟤는 엄마가 있어.’ 이러면서. 정말 아픈 기억이 있는데, 다들 학교 다니면서 소풍 가잖아. 소풍 가면, 도시락, 과자 같은 것을 싸서 가잖아? 그런데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 힘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기 싫은 얘기야?
아빠: 아니, 그건 아닌데. 별 얘길 다 하는 것 같아서. 음, 소풍날이었어. 고아원에서는 소풍날에 빵을 두 세 개씩 싸 줬지. 고아원에 제빵기가 있었거든. 평소에는 빵을 해 주지 않는데, 그날은 소풍이라서 그런지 우리가 구경도 못했던 빵들을 만들어서 주더라고. 맛있는 냄새가 나고 좋았어. 그걸 가지고 신나서 소풍에 갔지. 평소에 학교에서 날 잘 챙겨 주던 친구가 하나 있었어.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는 내가 고아원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자기가 싸 온 음식을 나눠 주더라고. 같이 먹자면서. 엄청 고마웠어. 나도 뭔가 주고 싶은데 빵 밖에 없으니까 빵 두 개 중 하나를 줬어. 빵 두 개 중에 하나를 줬는데...
아빠는 '빵 두 개 중에 하나를 줬는데.'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말을 제대로 잊지 못했다. 아빠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내가 뭔가 아빠의 엄청나게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나: 아빠, 괜찮아?
아빠: 괜찮아. 빵... 빵을 하나 줬는데, 그걸 홱 하고 버리더라고. ‘맛없는 거 먹지 말고 내 도시락 같이 먹자.’ 하면서 말이야. 나한테는 정말 소중하고 귀한 빵이었는데. 걔한테는 그런 게 아니었나 보더라고. 지금이야 뭐, 그럴 수 있지 싶은데 어린 마음에 엄청 충격이었어. 친구가 나쁜 마음으로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어. ‘야, 고아원에서 만든 빵이야? 그런 걸 왜 먹어.’ 이러면서 내 앞에서 버리는데……. 차라리 가져가서 집에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냥 나한테는 정말 좋은 것이었는데 그 친구한테는 그렇게 버릴만한...그런 것이었구나.
지금까지 살면서 아빠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빠는 빵 이야기를 하며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내 앞에서 아홉 살 아빠가 울고 있었다. 아빠는 눈물을 보인 것이 민망한지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 아빠……. 많이 속상했겠다.
아빠: 어릴 때 생각하니까 자꾸 눈물이 나네. 사실 어릴 때 딱히 고생했던 건 없어. 할머니가 대단하지. 고모들한테도 고맙고. 그 어려운 상황에 자식, 동생 대학 보내고, 일한다고 고생하고…….
나: 아까 아빠가 우리를 고아원에 데리고 갔다고 했잖아. 거기에 왜 데리고 갔어?
아빠: 너희에게 뭘 보여 주려고 데려갔다기보다, 아빠가 그곳에 다시 가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어. 그곳에서의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은 아니지만, 나중에 한 번쯤은 다시 가 보고 싶었어. 아까 한 얘기 말고 하나 더 기억에 남는 게 있어. 고아원에서는 군대처럼 단체 생활을 했다고 했잖아? 필요한 물품도 똑같이 지급받았어. 공책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다 쓰면 그걸 반납한 뒤 새 공책을 줬어. 그래서 새 공책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도 나.
나: 아빠 지금은 노트 절대로 끝까지 다 안 쓰잖아. 몇 장 쓰고 또 새 노트 쓰고 그러잖아. 그때 한이 맺혔나? 어른 되어 다시 가 보니 어땠어?
아빠: 기억 속에는 정말 너무 큰 곳이었는데, 막상 가 봤더니 작더라. 고아원이 필요 없어져서 규모를 줄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원래 어릴 때 다녔던 학교를 커서 다시 가 보면 모든 게 엄청 작잖아. 그런 거랑 비슷했어. 내가 이렇게 작은 곳에서 지냈던 걸까?
거기서 지내다가 나중엔 가족 다 같이 서울에서 지내게 됐어. 그때 너희 엄마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전학가게 됐고, 교회도 같이 다니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