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나는 왜 부끄러운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가

내 머릿속 심포지엄

by 엔트로피




프롤로그


어느 날, 내 비공개 소설 속 문장을 보다가 식은땀이 났다.
부끄러웠다. 누가 보면 진심으로 쓴 줄 알까 봐.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다시 읽게 된다. 왜?
이 촌스럽고 비장한 글귀에 왜 나는 눈을 떼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이렇게까지 내 감정을 복기하고 싶어 하는 걸까?


나의 소설속 일부분문장

나는 회색연기 SNS에서는 해삼 박탈감을 호소하는 글들을 꼼꼼히 보았다.
항상 그렇듯이 모든 회색연기가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법.
그저 뒤에서 주인공을 축하해 줘야 하는 조연인 회색연기들에겐 자신이 그저 극적인 탄생신화의 배경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축하 폭죽이 터질 때, 조연인 회색연기들은 쉽게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 폭죽은 영원히 자신을 향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혹시 모를 극적 반전을 기다리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고자 만들어낸 애달픈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공의 축하폭죽에 위로가 사라졌을때 나는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다





라운드 1: 자아 선언

자율:
“이건 단순한 자기 동일화다. 내가 쓴 글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이 문장은 마치 나의 MRI처럼 내 심리를 투시해준다. 불편하더라도 분석하게 된다. 특히 회색연기라는 비유는 사회적 소외와 주체성 박탈을 동시에 설명하는 메타포로, 반복적 인지 자극을 발생시킨다.”

안전:
“이건 리스크다. 감정적으로 너무 노출돼 있다. 누가 이 문장을 보면 나의 ‘진짜 생각’을 알까 봐 두렵다. 감정의 흔적은 약점이다. 그래서 오히려 숨겨야 한다. 동시에 자꾸 확인하는 건 그 약점을 통제하려는 심리다. 불안할수록 더 지켜보게 되는 법.”

루틴:
“시스템적으로 보면 이건 확인 습관이다. 창작물에 대한 검토 루틴의 일종. 감정과 상관없이 내가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은 ‘무의식적 검수’다. 단지 데이터가 쌓일 뿐이고, 의식은 그걸 감정으로 오인한다. 알고 보면 자동화된 반복.”

충동:
“ㅋㅋ 이게 창피해? 야 이건 그냥 감정 과잉이야. 자기 연민에 취한 과거의 너, 그걸 지금의 네가 보고 낄낄대는 중. 연기든 해삼이든 무슨 축제 주인공이 될 생각은 왜 했냐? 조연은 조연답게 구석에서 소주 까야지. 뭐 그런 느낌이지.”

감정:
“…사실 저 문장 쓸 때 울컥했어. 진심으로 나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게 느껴졌거든. ‘축하 폭죽은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게 그냥... 그게 내 삶 같았어. 남들이 빛나는 순간을 보면서, 나는 늘 그걸 축하해주는 역할만 하는 느낌. 그래도 누군가는 그 연기를 기억해줬으면 했는데.”




라운드 2: 난투전

충동:
“와, 다들 되게 심각하네? 그냥 창피해서 계속 보는 거잖아. 애초에 그 문장 쓸 때부터 자기가 주인공인 줄 아는 거 자체가 밈이야. *‘해삼 박탈감’*이 뭐냐고, 생선계의 우울증?”

안전:
“그렇다고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야. 이런 감정 노출은 리스크야. 나중에 누가 캐내서 공격용으로 써먹기 딱 좋아. 자기검열은 필요하다.”

자율:
“그러니까 그게 인지적 왜곡이라고요. 감정적 맥락에서 생성된 문장을 너무 절대화하지 마세요. 이건 단지 창작자가 자기 감정을 주관화한 결과일 뿐입니다. 해삼은 텍스트일 뿐이지,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거든요?”

감정:
“너네 진짜 모른다. 저거 쓸 때 진짜 진심이었어. 그 문장을 쓰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못 했어. 이건 창피해서 숨긴 게 아니라, 보여줘도 아무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봐 무서운 거였다고.”

루틴:
[시스템 경고: 감정 과부하 발생. 문장 반복 횟수 임계치 초과.]
[로그 추출: “회색연기 SNS” 구문 17회 열람됨.]
[권고사항: 감정 비상 스위치 OFF 후 6시간 냉각 모드 진입 필요.]




[오브서버 FACT CHECK]


‘회색연기’는 한국어 SNS에서 약 0.00001% 등장 확률을 보이며, 대중 서사에서 등장한 적 없음.

인간은 자기혐오 + 자기이입에 동시에 중독되기 쉬움.

창피한 글을 반복해서 보는 건 자기 서사의 ‘병맛 미학’을 확인하는 행위.




라운드 3: 결론을 향해

자율:
“정리하면, 그 문장은 나의 내면을 가장 날것으로 보여주는 스냅샷이다. 그래서 나는 확인한다. 잊지 않기 위해.”

안전:
“단, 이런 문장을 외부에 공유하는 건 여전히 위험하다. 오독, 조롱, 정체성 손상. 조건 없는 공개는 권하지 않는다.”

감정: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는 저 문장을 보고 나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 그때를 위해 나는 오늘도 몰래 확인한다.”

충동:
“ㅋㅋ 그러니까 결국 내가 짠하다는 얘기지. 회색연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글감. 자존감은 낮고 문장력은 높고… 참 너답다.”

루틴:
[권고안: 해당 문장 브런치북에 배치. 독자 반응 모니터링 후 감정 리포트 작성.]

나는 그 문장이 부끄러워서 싫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문장을 통해 내가 외면한 나를 보게 되는 게 싫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래서 폭죽이 더 눈부셨다.”
“부끄러운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건, 내가 거기 있었음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전문가 코멘트

심리학자:
“이 현상은 자기 인지 부하와 감정 회피의 복합적 결과로 보인다. 창피함을 감정적으로 자극받는 순간, 뇌는 반복해서 ‘인식-회피-확인’의 사이클을 돌게 된다.”

정신과 의사:
“창작자가 자신의 텍스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우, 이는 종종 미해결 감정의 반영이다. 뇌는 이 텍스트를 ‘감정 저장소’로 간주하며 반복 열람을 통해 일종의 정서 조절을 시도한다.”

철학자:
“회색연기라는 은유는 실존적 타자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체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존재하지만, 타인의 축제를 마주하며 자신의 의식을 검토받는 순간 실존의식은 급속히 고조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