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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影)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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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Sep 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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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너는 아주 어둡고 밝을 땐 나타나지 않지
내 안에 꼭꼭 숨어서 내 바깥을 기웃거리지
적당히 밝아지고 적당히 어두울 때
너는 내 안에서 나와 내 발꿈치 가에서
너의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나를 따라다니지
우린 어디든 함께 해서 나는 네가 없다면
이 세계에 존재하지 못할 거야
영, 너의 세계에는 꽃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거리의 쓰레기도 모두 숨어들지
네 세계의 크기와 투명함과는 상관없이
너는 네가 늘어진 세계가 너에게 숨어들게 하지
그렇게 작게 한숨을 쉬고 안도하고
적당한 밝음과 적당한 어둠에서
적당한 평화를 누리게 하지
영, 너의 적당함이 좋아서 너의 적당함을 사랑해서
내 발꿈치에 늘어진 너를 내려다보며
나는 무릎을 꿇고 점점 내려가 너에게 닿아
너를 덮고 너의 세계에 숨어 들어가
하지만 숨겨지는 건 너이고
숨겨지지 않고 온전히 드러난 나는 너를 안고
네가 드리워졌던 세계를 느끼지
너는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차갑고
영, 이제 다시 지극한 어둠과 지극한 밝음에서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너를 안았을 때 느꼈던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평화를 내게 내려줘
결국 나는 너로서 살고 너로서 세계를 걷고
너로서 세계에 닻을 내리지
지극한 어둠과 지극한 밝음에서
나는 어느 영화에서 배우의 대사처럼
발 없는 새가 되어 지극함을 배회하지
영, 그러니 내 곁에 누워 적당한 평화를 보여줘
영, 어쩌면 나는 끝끝내 사랑하지 못할 거야
영, 나의 불안을 삼켜서 지극한 어둠에 묻고
지극한 밝음에 태워 흩뿌려줘
영, 영,
영영,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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