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파리에 가기 전엔 제대로 외롭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회피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장치가, 대한민국에는 있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불안함이나 외로움이 내 마음을 잠식하려고 하면, 나는 아주 쉽게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에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삶. 손을 뻗으면 기댈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겐 너무나 많아서, 간간이 나를 잠식하곤 했던 상처 같은 건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랑스에, 유럽에, 파리에 진한 향수를 느꼈다. 그곳이 내 집인 것처럼, 내 삶이 거기 있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그곳에 가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허영에 가득찬 마음이, 파리로 나를 이끌었다. 보바리부인처럼. 똑같은 것이 지겹고 싫었던 마음의 이면에는,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도 질려버리면 어쩌나, 변화없이 지겨운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불안한 마음과 낮은 자존감에서 도망치고 회피하다보면, 결국 발 디딜 곳을 영원히 찾지 못하는 법이지만, 그때 나는 그걸 몰랐다.
반면 왜 그렇게 파리의 삶이 시궁창 같았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설국열차 삼등칸에서 꼬리칸으로 밀려나는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학자 장희진은, 대한민국 여성은 20대에 ‘젊음’과 ‘외모’라는 힘으로 유일하게 남자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 찬란하던 시절, 좋았던 삶을 뒤로하고 더 나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으로 갈 때의 그 마음은 상상치 못한 인종차별과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행정 서류들과 절차, 가난과 외로움에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똑똑한 학생,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좋은 사람, 멋진 인생에 포지셔닝 되어있던 삶이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도움을 청해도 못들은 척 하는 스물셋 남짓한 아이들 사이에서 중국인 유학생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내 삶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거나 타자의 위치를 상상해 볼 여지가 드물었다. 50여 명 빼곡히 찬 강의실 한 켠에 있던 한 두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 농촌에 팔려오듯 시집온 결혼이민자들, 굳이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감내하는 게 익숙해져버린 어떤 부류의 사람들 같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나와 엮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있었을까? 나 자신의 인정욕구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왔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감탄하는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프랑스에서 받던 멸시가 사라지고,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에 왔는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어떤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성공한 유학’인 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객관적으로’ 좋은 기업에 많은 연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 같고, 다수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경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프랑스라는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처럼, 우리는 벌거벗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어깨를 잔뜩 위축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하면서도 머리속이 새하얘지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더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이 프랑스에서의 상처를 통해 이상한 인류애를 얻었다. 한국이 마치 전체주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건, 프랑스가 자유와 평등의 나라여서가 아니라, 어느 나라나 사람들은 편견에 가득차서 타자를 대하며, 그런 편견과 멸시를 경험했는데, 우리나라는 프랑스보다 더 노골적인 형태로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상처받고 외롭고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한 인류애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련해지곤 한다. 프랑스에 남은 이들은 한국의 이런 형태의 토탈리즘을 견딜 수가 없어 그대로 황무지에 남은 사람같이 느껴진다.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 노동당, 에이즈에 걸린 성소수자, 다자연애자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프랑스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