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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빈 Oct 25. 2020

한 가을밤의 판타지아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100마일, 후회따윈 없어. 몸 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ㅡ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김연수 <세상의 끝, 여자친구>


1. 

프랑스어로 하는 수업은 점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고, 친구들과의 대화는 언제쯤 긴장을 놓고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한국에서라면, 한국어로 한다면, 하는 생각들이 내 선택을 돌아보게 하고, 점점 이런 상황이 나를 짓누른다. 언어라는 장벽에 부딪혀 자의식은 점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허약한 이상주의자의 자의식.

나의 자잘한 취향이나 잘난 줄만 알았던 공무원의 경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 하나에도 어떤 강한 열정을 가져본 적도 없는 나는, 실패한 적도 없었지만 딱히 무엇에도 성공한 적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선 무엇에 기대야 하나. ‘나’ 라는 존재증명을, 도대체 무엇으로 해야하나. 누구의 애인이거나, 어떤 직업을 가졌거나, 무엇을 한 사람이라거나- 나를 감싸던 그 많은 옷들이 사라지고, 나는 이곳에서 말 못하고 버벅거리는 한 아시아 여성일 수 밖에, 그 외에 어떤 포지셔닝을 가져야 할 지 모르겠다. 프랑스에 가기 전엔 특별해지고 싶었는데, 파리에 오니 난 누구보다 평범하고 싶다. 

그러던 중에, 파리한국영화제에 초청팀 스탭으로 일하게 됐다. 개선문이 있는 트로카테로에서 매년 10월 말 열리는 영화제다. 처음엔 유학생들의 영화 동아리로 시작했다가, 어느새 규모를 키워가 내가 참여했던 2017년은 10회를 맞았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키운 김동호 위원장부터 류승완 감독, 최동훈 감독 같은 국내의 굵직한 감독부터 장건재 감독, 김대환 감독 등 그 해 주목할 만한 영화를 만든 감독들도 파리를 찾았다. 공항에서 이들이 도착하면 숙소를 안내하고 일정을 전달하고 매일 공식 일정을 소화하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나는 류승완 감독님 팀과 일정을 같이 했다. 류승완 감독님은 루이비똥 재단 미술관을 다녀와 영화의 구도를 얘기했고, 음료수 하나를 봐도 영화와 연관지어서 말했다. 류승완 감독님과 최동훈 감독님은 나의 사투리를 듣더니, 국내에서 사투리를 가장 잘 하는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절대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 배우에 대해서 말하며 웃었다. 장건재 감독님과 김대환 감독님, 홍석재 감독님과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함께 갔다. 그 때 마틴스콜세즈 특별 전시를 하고 있었고, 세 감독님들의 신난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했다. 이렇게까지 영화에 열정적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거구나. 빠르든 느리든 그들의 호흡대로 영화에 푹 빠져서 이야기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본 건 행운이었다. 

영화제에서는 그립던 한국 영화를 만나볼 수 있다. 시간이 많이 나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틈틈이 스탭들이 영화를 볼 수 있게 했다. 그 중에서도 장건재 감독님의 <한 여름의 판타지아>는 내게 그 해의 영화가 되었다. 김새벽이 연기한 혜정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닮아있어서 그렇게나 눈물이 났다. 꿈을 쫓다가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해져버려서, 물러설 곳도 없이 나를 몰아붙여 어디론가 왔는데 이제는 나아가야 할 길도 돌아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주저 앉아서 울고만 싶어서. 이 영화는 이와세 료처럼, 나를 위로했다. 꿈의 노예가 되지 않길.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내길. 과할 필요는 없지만, 내 멋과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길.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돼, 따뜻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느리게 살아도,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처럼 내 호흡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과 열정을 가진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쁘고 게으른 삶을 청산하고, 안바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누구나 자신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정신이 담긴 예술로 살아낼 수 있으니까. 



2. 

이 시기, 나를 지탱해준 책들이 있다. 장건재 감독님이 인천공항에서 사서 주고 간 <한국이 싫어서>, 엄마가 부쳐준 <무의미의 축제>, 책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친구가 선물로 준 <정확한 사랑의 실험>, 국문과 출신의 페미니스트 친구가 빌려준 <마음사전>과 <아무도 아닌> 같은. 파리에서의 삶은, 결국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음을 채우는 책 속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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