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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Aug 24. 2020

최저임금 받으며 참아 낸 말들

청년들의 직장 일기

일터의 인권을 주제로 동네 이십 대 청년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온갖 경쟁과 스펙 쌓기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 겨우 한자리 비집고 들어간 일터에서 그들이 참아내야 했던 일들이  토하듯 터져 나왔다.


T는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고 졸업과 함께 몇 천의 학자금 대출 빚을 떠안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전공을 살려 꽤나 알려진 기업에 취직했지만, 그곳에서도 아르바이트생 때 들었던 말들을 여전히 들었다. 매일 지하철 막차 시각까지 죽도록 일하고도 “니들 때문에 일이 늦어져서 본사에서 돈이 늦게 나온다.”는 무시와 모욕의 말들을 일상다반사로 들었다. 하청업체의 부도로 납품이 밀리게 되었는데도 책임은 피라미드의 맨 끝 자리, 신입사원들에게 돌려지곤 했다.


“제 연봉이 2000만 원 정도였어요. 다른 신입보다 200만 원쯤 더 높은 편이었는데도, 수당 없이 일했던 초과 근무 시간을 따져보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이었어요. 그런데도 그 자리 놓치면 경쟁에서 밀려나 다시 취직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기 힘들었어요.” 매일매일 너희들 말고도 일할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자존감은 갈수록 낮아졌다. 선배들도 이력서에 경력으로 쓸 수 있으려면 1년 이상은 다녀야 한다고 했다. 1년 안에 그만두면 인내심이 부족하거나 사회성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몸이 견디지 못했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1년을 버텼다. 어느 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이러다 직장을 다시 구하지 못할 것 같다는 공포보다 더 커졌을 때, 비로소 사표를 냈다. 사직서에 과로와 임금체불 때문에 사직하겠다고 썼다는 이유로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장은 사무실이 떠나가라 욕을하고 화를 냈다.  “나에게는 일하지 않을 권리도 없는 것 같았어요.”


예술학교에서 플루트를 전공하고 유학을 앞두고 있는 K. 음악을 전공하고 유학을 앞두고 있다고 하면 남들 보기에 부모덕에 곱게 자라 듯 보이지만 사실 그녀야 말로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잔뼈가 굵었다.  “연주자라고 하면 쉽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도 잘 벌 수 있을 걸로 생각해요.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전공자가 워낙 많고, 그나마 제 전공 쪽은 좀 나은데, 피아노 같은 경우는 더 심하대요. 결혼식 같은 행사에서 연주하면 건당 만원이 들어올 때도 있대요. 하루 종일 여러 군데 행사장을 따라다녀야 ‘일당다운 일당’을 벌 수 있어요. 선배들 중에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아요. 저도 교수님 소개로 10만 원 받기로 하고 갔는데 6만 원 밖에 못 받은 적이 있어요.”


 번은 일하고  달이 지나도 입금이  돼서 행사를 주관한 곳에 전화를 했다. 행사주관한 에이전시에서는 학과 교수의 친구였던 선배에게 돈을 모두 보냈다고 했다. 얼마 지나  선배가 전화를 했다. 자기가 돈을 떼어먹으려 했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여기저기 연락해서 사람 쪽팔리게 하냐고 화를 냈다. 카페에서 일하며 별별 어른들을  만났다. 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그냥 무조건 반말부터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커피 주문을 받고 뜨거운 건지, 아이스인지 물어봤다가 “ 같으면  날씨에 뜨거운  먹고 싶겠냐?”라는 말을 들었다.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도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다. 손님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늦은 점심으로 냉동식품을 먹고 있다가 선배 아르바이트생에게 별별 욕을  들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피곤하니까, 서로 같은 처지면서도 봐주는 것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욕까지 하며 화를  것은 업주가 아니라 선배 아르바이트생들이었다. “바로 알바생이 보강  되면, 본인들만 힘들어지니까요.”  


나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수 없이 성희롱을 당했다.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한 것도 여러 번이고, 한 번은 길거리에서 내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간 남자를 잡아서 경찰에 넘긴 적도 있다. 그로부터 세월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 21세기 청년들이 경험하는 성폭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세상이 변했다고 하는데, 어른들만의 착시였던 것일까.


“주점에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는 영업 마치고 사장이 자꾸 퇴근을 못하게 한대요. 주점 문 닫고 둘이서 한잔 하자고 하면서.. 막차 타야 한다고 하면 택시비 주면 될 거 아니냐고, 알바시간으로 쳐줄 테니 술을 같이 마시자고. 사장이 끔찍하기는 한데, 주점이 일하기가 편하고 알바비도 괜찮아서 그만둘 수가 없대요.” “나이가 우리 아빠뻘인 지점장이 계속 자기를 오빠, 오빠 그렇게 불러 달래요. 한 번은 우산에 찔려서 손가락에서 피가 좀 났는데, 갑자기 다가오더니 오빠가 빨아 줄게, 그러는 거예요.” “공연히 챙겨주는 척하면서 자기를 아저씨라고 부르라는 선임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관심 있게 봐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감사했죠. 그런데 내가 커피 마시러 가면 쪼르륵 다가와서 말을 걸고, 결재도 내가 와야 해 준다고 하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니까 나중에 어려운 결재가 있으면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가라고 하는 거예요. 회식 때도 나를 계속 찾으니까, 뭐랄까 둘이 썸 타는 것 같은 분위기.. 그런 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분이 유부남이고 나보다 열 몇 살은 많은 분이었거든요.”


청년들은 내가 인권위 조사관이라는 이유로 속마음을 털어 놓았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듣는 일 밖에 하지 못했다. 이날 내게 이야기를 해줬던 청년 누구도 부당노동이나 성희롱으로 회사를 신고한 사람은 없었다. 조용히 일터를 그만두는 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도서관과 학원을 분주히 뛰어다닐 청년들. 그들은 이야기를 털어 놓아 속이 좀 시원해졌다고 하면서 마무리 말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런 거 잘못된 거 맞죠? 그런데, 왜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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