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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19. 2022

신윤복 <쌍검대무>,
장레옹 제롬 <전무戰舞>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인간이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본능인지라 지금과 형식은 다를지라도 춤과 노래는 인류역사에 늘 있어왔다. 춤과 노래는 개인 감정의 발산으로 표출되었고, 공동체에서 중시하는 제례 때에도 중요한 요소였다. 여러 종류의 춤 중에서 특히 검무劍舞에 대해 알아본다. 

검무는 상고시대의 수렵무용, 의례무용, 전투무용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전통춤이다. 우리나라 검무의 양식으로는 신라의 황창랑黃昌郞 설화의 황창검무, 가면을 쓴 동자가 추는 동자가면무가 있다. 황창검무의 유래는 『동경잡기』 권1 <풍속조>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사람 황창랑이 일곱살 때 백제로 들어가 칼춤으로 구경꾼을 모았다. 소문을 들은 백제왕이 불러들여 백제왕 앞에서 춤을 추다가 왕을 찔러 죽였고, 황창랑도 그 자리에서 백제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후 신라 사람들이 그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춘 것이 황창검무이다. 황창검무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까지 이어져 처용무와 함께 공연되었다. 

조선 숙종 이후에는 여기女妓검무가 나타난다.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지은 책 『서포집西浦集』에 수록된 칠언고시에 여자가 황창무를 춘 것으로 보이는 한 시구가 있다. “취미여아황창무 翠眉女兒黃昌舞”. 숙종38년 연경사행燕京使行 수행원 김창업金昌業(1658-1722)의 왕래견문록 『노가재연행록 老稼齋燕行錄』의 기록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여기 2명의 검무 모습이 있다. 황창검무의 무적武的 인 성격과 달리 여기검무는 예적藝的 성향의 검무로 변화되었다. 

정조 때 정재呈才(대궐안의 잔치때 벌이던 춤과 노래)로 정착되면서 여기검무는 궁중에서 공연한 각 지방 교방의 기녀들에 의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교방검무라고 한다. 정조 때 문신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시문집 『번암집 樊巖集』에 수록된 <망미록 하下> 여섯 번째 시에는 검무를 재촉하는 구절이 있다. “기생 아이에게 특별히 명하여 검무를 재촉하네 別飭兒姬劍舞催”. 검무를 여기女妓가 추었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각 지방의 독특한 특색을 담은 현재의 향제鄕制 교방검무 양식이 나타났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1795)에 교방검무가 등장하는데 검무의 복식에 치마 저고리 쾌자 전대 전립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색상은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다르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678&menuNo=200018 

신윤복 <쌍검대무> 《혜원전신첩》 조선. 지본채색. 28.2x35.6cm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작은 연회자리인 것 같은데 상차림이 보이지 않는다. 술과 음식이 나오기 전에 검무를 감상하는 것 같다. 

교방검무는 전반부에 정적인 동작으로 시작하여, 칼을 들고 추는 후반부에는 잽싼 움직임을 표출하는 이중적인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된 춤이다. 그림의 장면은 발이 바닥에서 약간 떠있는 듯 후반부에 접어든 동적인 모습이다. 여러 풍속화와는 달리 이 그림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아래는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오는 <평양감사 향연도>중에 쌍검무 장면을 확대한 것이다.

<평양감사 향연도, 부벽루 연회도> 傳김홍도. 종이에 채색. 71.2x196.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연회중 쌍검무 부분. 오른쪽; 부벽루 연회도 전체.

<평양감사 향연도>는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의 세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s://artvee.com/dl/la-danse-pyrrhique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전무 戰舞 The Pyrrhic Dance> c.1885 캔버스에 유채. 66x92cm. 개인소장.   

 

그림은 프톨레마이오스(고대 이집트) 시대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그린 전쟁 춤 장면이다. 신윤복의 쌍검대무가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기녀들이 추는 춤이라면 피리키오스(Pyrrhichios/ Pyrrhic Dance)는 훈련용 전쟁 춤이다. 파란 하늘 아래 굳건히 버티고 서있는 건축물은 우리를 먼 먼 옛날 포틀레마이오스(Ptolemaios/ Ptolemaic BC305-BC30)시대로 끌고 간다.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 (BC69-BC30)의 죽음으로 포틀레마이오스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 유물은 아직도 남아있다. 사막에 실물로 존재하는 건축물들은 이집트를 여행한 화가들의 화폭속으로 옮겨졌다. 그림 속 넓은 벽면에는 암소 뿔 머리 장식과 태양 원반을 쓴 하토르Hathor가, 바로 옆 문설주에는 변형된 상형문자가 희미하게 그려져있다. 

전쟁 춤을 추는 두 남자의 몸에 휘감긴 흰색 천이 하이라이트가 되어 빛나고, 칼을 휘두르는 팔과 건각의 단단함이 그림에 역동성을 더한다. 섬세하게 표현한 옷주름은 이들이 격렬히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준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긴 창을 들고 있는데 피리키오스가 끝난 후에 혹시 창의 대련이 있는 것 아닐까.

피리키오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한다.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그의 전우이자 연인인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 때 불타는 장작더미 옆에서 이 춤을 추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법률 Laws/Leges』에 피리키오스를 묘사했다. 타격과 다트를 피하는 방식과 적을 공격하는 방식의 빠른 동작의 춤이라고 한다. 그림 속 춤추는 이들의 빠른 움직임에서 가끔 부딪히는 창과 방패의 금속성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피리키오스는 처음에 오직 전쟁을 위한 훈련으로만 행해졌다. 문자 그대로 ‘전쟁 춤’이다. 특히 스파르타인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 춤을 가르쳤다. 아테네의 청년들은 체조 훈련으로 팔레스트라(Palestra체육관, 체육학교)에서 이 춤을 추었다. 그리스 전역에 흥행하던 피리키오스는 시저Julius Caesar(BC100-BC44)가 로마에 도입하여 많은 경기를 벌이며 로마 제국에 퍼졌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그랜드 투어를 경험한 장레옹 제롬은 그의 학문적 지식과 예술적 감성을 혼합하여 피리키오스를 그의 화폭에 재현했다. 

 

장레옹의 피리키오스는 휘두르는 검이 방패에 부딪치는 쇳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닥에는 연습용인지 목검 두 개가 놓여있고, 이들이 휘두르는 것은 실제 금속 검이다. 전쟁을 위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윤복의 무희들은 쌍검을 들었어도 무섭지가 않다. 그 춤이 유희인 줄을 알고 감상하기 때문이다. 기녀들은 몸동작 하나하나에 굴곡진 율동감이 있다. 옷자락마저도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 흩날리는 모습이 시선을 끈다. 같은 검劍을 휘두르는 춤이라도 유흥을 위한 춤과 전쟁을 위한 춤은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작가 알기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05.11 프랑스 브술 출생, 1904.01.10 프랑스 파리 사망)은 아카데미즘으로 잘 알려진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그는 동양적, 신화적, 역사적, 종교적 장면의 학문적 회화 전통을 예술적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1840년 파리로 가서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1797-1856)의 제자가 되었고 1843년 그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피렌체, 로마, 바티칸, 폼페이를 방문했다.  1844년 파리로 돌아와 들라로슈의 많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1806-1874)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잠시 동안 그곳에서 공부했다. 1847년 <수탉 싸움> 으로 살롱에 데뷔하여 이름을 알리게 됐고, 금메달을 수상했다. 1850년 살롱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그리스 인테리어>는 황제의 사촌인 나폴레옹 왕자가 인수했고, 현재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1853년 제롬은 러시아로 떠났으나 크림 전쟁은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렸고 이것이 제롬의 동양과 터키와의 첫 접촉이다. 1855년 11월 교육부의 위임을 받아 조각가 오귀스트 바르톨디Auguste Bartholdi(1834-1904)와 함께 이집트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카이로에서 파이융을 거쳐 나일강을 따라 아부심벨까지, 다시 카이로로 돌아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와디 엘-아라바를과 예루살렘을 거쳐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전형적인 그랜드 투어였다. 이집트 그랜드 투어는 제롬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아랍 종교 관습, 아랍 풍속, 북아프리카 풍경을 묘사하는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시작이 되었다. 그의 최고의 작품은 이집트 또는 오스만 주제에 기반한 동양주의 흐름에서 영감을 받았다. 1862년 제롬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여행했다. 

1863년 1월 17일에 유명한 출판사이자 미술상인 구필(Adolphe Goupil)의 딸 마리(Marie Goupil)와 결혼했고, 1864년에 그는 파리의 미술 학교(École des Beaux-Arts)에서 회화 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40년간 봉직했다. 1874년 제롬은 그의 역작 <그레이 에미넌스>를 살롱에 내걸자 비평가와 대중의 찬사가 쏟아졌고 그 그림으로 금메달을 받았다.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제롬은 그의 첫 번째 조각품인 <검투사>를 선보였다. 1878 년부터 제롬은 주로 다색으로 조각품을 제작했는데 그의 조각품은 종종 장르 장면, 인물 또는 알레고리를 나타낸다. 다색성은 그의 조각품의 기술적 특징이다. 1914년까지 구필Goupil은 제롬의 작품 거의 370개를 판화 또는 사진으로 복제하였다. 여러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방문지의 문화에 영감을 받아 회화와 조각으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던 장레옹 제롬은 1904년 사망하여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낯선 말 풀이

교방敎坊       – 1.고려시대의 기생학교. 말기에는 기생학교가 있는 지역을 이르기도 하였다. 2.조선 시대에 장악원의 좌방과 우방을 아울러 이르던 말. 좌방은 아악을, 우방은 속악을 맡았다.

향제鄕制       – 지방에서 유행하는 시조 창법.

지체            – 어떤 집안이나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나 지위.

전립戰笠      – 조선시대에 무관이 쓰던 모자의 하나. 붉은 털로 둘레에 끈을 꼬아 두르고 상모, 옥로 따위를 달아 장식하였으며 안쪽은 남색의 운문대단으로 꾸몄다.

삼현육각三絃六角 – 1.삼현과 육각의 갖가지 악기. 2.피리가 둘, 대금, 해금, 장구, 북이 각각 하나씩 편성되는 풍류. 감상의 성격을 띨 때는 ‘대풍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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