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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29. 2022

신한평, 신윤복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일재逸齋 신한평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1725-1809 이후)은 어진 제작에 3차례 참여한 어용화사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산수·인물·초상·화훼를 잘 그렸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재逸齋. 집안은 화원 가문이었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 동생 신말주申末舟(1439-1503)의 8대 신세담申世潭, 9대 신일흥申日興, 10대 신한평申漢枰 등 3대에 걸쳐 도화서 화원이 배출되었다. 조선의 풍속화가 신윤복申潤福의 아버지이다. 신한평은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영조ㆍ정조ㆍ순조 초년까지 봉직했다.

신한평은 중인 출신으로 추정된다. 양반가의 족보인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고령高靈 신씨申氏 족보에 기록이 없다. 7대조(신수진)가 서자이기 때문에 이 집안은 중인으로 떨어진 것이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창현(1850-1921)이 작성한 『성원록姓源錄』의 ‘고령 신씨’ 조에 신한평, 신윤복의 가계가 수록되어 있다. 『성원록』은 역관 의관 산관 등 중인계층의 성씨를 수록한 족보이다. 


조선 숙종 때부터 어진을 그리게 되면 화사의 선발에서부터 제작, 봉안 등의 절차를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해 제도적으로 관리했다.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어진으로 통일된 것도 숙종 때다.
 신한평은 영조49년, 정조5년, 정조15년에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어진도사에는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 1명, 몸 부분 곧 옷을 그리는 동참화사 1명, 설채設彩를 돕는 수종화사 4-6명 등 총 6-8명이 동원되었는데 많을 때는 13명이 되기도 했다. 신한평은 세 차례 모두 수종화사로 참여했다. 사물과 상황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색감을 입히는 채색에 더 재능을 보인 것 같다.
 

정조는 영조가 어진을 10년마다 1본씩 모사했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그 뜻을 이어 받들려고 하였다.

정조 5년(신축, 1781) 8월 26일(병신) 기록.
“내가 어진(御眞) 1본(本)을 모사(摹寫)하려 하는데, 이는 장대(張大)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다. - 중략 -  이어 화사(畵師)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김홍도(金弘道)에게 각기 1본씩 모사(摸寫)하라고 명하였다.” 1

정조는 10년 간격으로 어진을 모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조 5년(신축, 1781) 9월 1일(경자) 기록.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승지(承旨)·각신(閣臣)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을 부르고는, 어용(御容)의 초본(初本)을 제신(諸臣)들에게 보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런 거조를 하는 것은 대개 선조(先朝)에서 10년 간격으로 어진(御眞)을 모사한 규례에 따름으로써 소술(紹述)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금년부터 시작해서 매 10년마다 1본(本)씩 모사하겠다. 그러나 애당초 장대(張大)하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않고 단지 각신(閣臣)으로 하여금 감동(監董)하게만 한 것이다. 봉안(奉安)하는 처소(處所)에 이르러서는 송조(宋朝) 때 천장각(天章閣)에 봉안한 고사(故事)에 의거 규장각(奎章閣)에 봉안하려 한다." 하였다. 2

정조 5년(1781) 9월 16일(을묘)에 어진이 완성되어 주합루宙合樓(창덕궁 규장각 2층)에 봉안하였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343신한평 <이광사 초상> 조선. 비단에 채색. 53.6x67.6cm.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방건을 보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다. 섬유 한 올 한 올을 섬세하게 다 묘사했고, 수염도 한 올씩 심듯이 그렸다. 이 초상화의 인물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아들 실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6)이 조선시대의 정치ㆍ사회ㆍ문화를 서술한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신한평의 이름이 당대의 쟁쟁한 화원인  정선ㆍ강세황ㆍ김홍도ㆍ심사정 등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어 화원으로서 신한평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신한평은1759년(영조 35)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 제작에도 참여했다. 1802년(순조 2)에 거행된 순조와 순원왕후의 혼례식을 기록한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이어서 1804년(순조 4)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의 반차도와 도설圖說 제작에도 참여했다. 


http://www.heritage.go.kr/gae/sub3_1.html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정조는 화원을 격려하고 후원해주지만 가끔 채찍질도 했다. 

정조 5년(신축, 1781) 12월 20일(무자) 기록.
“예로부터 관아에서 종이와 잡다한 물종을 주고 화사(畫師)를 초계(抄啓)하여 연말이면 세화를 그려서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세공(歲貢)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근래에는 전혀 마음을 쏟지 않는다. 올해에는 이른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솜씨가 익숙한 자도 모두 대충대충 그리는 시늉만 냈으니 그림의 품격과 채색(彩色)이 매우 해괴하였다. 세화를 잘 그린 자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상격이 있으니, 못 그린 자에 대해서도 어찌 별도의 죄벌(罪罰)이 없겠는가. 이것 또한 기강과 관계된 것이다. 먼저 그려서 바친 화사 중에서 신한평(申漢枰), 김응환(金應煥), 김득신(金得臣)에 대해서는 곧 처분할 것이니 이로써 해조에 분부하되, 나중에도 다시 태만히 하고 소홀히 할 경우에는 적발되는 대로 엄히 처리할 것이니 미리 잘 알게 하라.” 3

자유 주제를 내놓고 본인(정조)이 원하는 책거리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벌을 주는 일도 있었다.

『내각일력』
정조12 (무신, 1788) 년 9월18일(병자)
草榜判付畵員申漢枰李宗賢等旣有從自願圖進之命則册巨里則所當圖進而皆以不成樣之別體應畫極爲駭然竝以違格施行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草榜判付 초방판부(합격자 명단의 초안에 대한 임금의 결재문) :

畵員申漢枰‧李宗賢等 화원신한평 이종현등,  

旣有從自願圖進之命기유종자원도진지명(이미 본인이 원하는 대로 그려서 바치라고 명하였으니), 

則册巨里則所當圖進칙책거리칙소당도진(책거리는 응당 그려서 바쳐야하지만), 

而皆以不成樣之別體이개이불성양지별체(모두 모양/형식을 갖추지 못한 다른 풍의 그림이니), 

應畫極爲駭然응화극위해연(그린 그림이 지극히 놀랍다.) , 

竝以違格施行병이위격시행(모두 격식을 어긴 것으로 시행하라)”

관료가 벼슬에서 물러나는 나이 70이 넘도록 도화서 화원으로 그림을 그린 신한평은 평생을 화원으로 살았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1814?)은 고령 신씨申氏 가문으로 도화서 일급 화원이었던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의 아들이다. 단원 김홍도와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 화원중 삼원三園으로 알려졌다. 풍속화에서는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신윤복을 조선 3대 풍속화가로 꼽는다. “혜원蕙園”은 단원檀園 김홍도의 호에서 “원園”을 따왔다. “혜“는 ‘난초 혜蕙’ 이다. ‘란蘭’과 ‘혜蕙’를 구별한 문헌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난초의 일종인 혜란蕙蘭이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라고 하는데 매란국죽이 상징하는 군자君子는 곧 선비를 일컫는다. 신윤복의 ‘혜원蕙園’이라는 호는 그가 선비의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홍도가 존경하는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 李流芳의 호를 그대로 따라 ‘단원檀園’이라 지었고, 신윤복은 거기서 원園을 따왔다. 오원吾園 장승업도 그와 같은 원園을 따랐다. 한편으로는 다른 해석도 있다.  혜원蕙園은 '혜초정원蕙草庭園'을 줄인 말이라는 것이다. 혜초는 콩과 식물로, 여름에 작은 꽃이 피는 평범한 풀이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자신을 빗대어 붙인 호라는 설이다.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극히 드물다. 

오세창(1864-1953)이 1917년 편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는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 첨사 신한평의 아들, 화원.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는 기록 뿐이다.

『청구화사』내에 혜원에 관한 언급이 있다. 『청구화사靑丘畵史』는 이구환(1731-1784)이 엮은 것으로 강세황의 고문서집인 『표암장서』에 수록돼있다. 『청구화사』에는 신윤복을 이렇게 설명한다.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떠돌면서 살았으며), 似彷佛方外人사방불방외인(마치 이방인 같았고), 交結閭巷人교결여항인(항간의 사람들과 가까웠다).” 신윤복에 대한 관찰기록이 거의 없는데 이 짧은 기록은 그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혜원은 20세인 1777년 도화서圖畵署 화원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화서 화원의 활동기록이 전혀 없다. 국가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도 이름이 없다. 아버지 신한평의 이름은 왕조실록에도 나오고 의궤에도 이름이 올려있다. 사학자이며 언론인인 문일평文一平(1888~1939)의 유고를 정리한 『호암전집(湖巖全集)』에는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그림을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쫒겨났다는 짧은 기록이 있다. 사실여부를 증명할 다른 기록은 없다. 다만 상피제相避制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상피제’는 관직에 있는 친인척들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지 못하는 법이다. 고려 선종 9년(1092)에 제정된 상피제는 조선시대에 더욱 엄격히 적용되었다. 조선은 관료제를 지향했던 사회였기 때문에 왕권의 집권, 관료체계의 질서를 위하여 권력분산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피제를 더욱 중요하게 실행했다. 아버지가 도화서 화원이므로 아들이 같은 도화서에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8-19세기 사대부들은 주로 산수화, 화조화, 사군자 종류의 남종 문인화를 선호했다. 신윤복은 이와 상반되는 밝고 짙은 채색을 선보였다. 

신윤복은 풍속 화가로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문제나 춘의春意 또는 여속女俗과 양반사회의 풍류를 즐겨 다루었다. 여성, 특히 기녀를 남성의 소유물이 아닌 주체적 인물로 부각시켰다. 양반들의 이중적인 생활과 연애 그리고 애환들을 우스꽝스럽지만 세련된 화풍으로 그렸다. 유교儒敎 사회에서 선비들의 이중생활에 대한 저항예술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실 고발 같은 역할이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칠세부동석’, ‘내외법’ 등 남과 여를 구별하는 엄격한 사회적 규율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양에는 근대적 소비사회가 도래했다.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해 유흥과 소비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신윤복의 그림은 정조 시대 조선 사회가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인간의 성과 연애 본능에 얼마나 자유로웠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부유한 양반과 중인들은 기방을 중심으로 한 향락문화를 즐겼다. 한편으로는 신윤복 그림의 향락적 주제들이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신윤복의 유명한 작품으로 《풍속도화첩/혜원전신첩惠園傳神帖》이 있다. 풍속화 30여 점이 들어 있는 화첩으로 각 면의 크기가 가로 28㎝, 세로 35㎝이다. A4 용지(21 x 29.7cm)보다 약간 더 크다. 거기에 산수, 인물, 집, 가구 등 모든 것을 그려넣었고, 1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 뿐인가. 달과 구름도 그리고 시를 써넣기도 했다. 각 그림 마다 글로 풀어서 쓰면 책 한 권은 족히 될만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풍속도화첩》은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를 다루었다. 조선시대 윤리관에 비춰보면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그림이다. 당시의 세속소설인 『이춘풍전』 『무숙이타령(왈자타령)』 『절화기담』(석천주인石泉主人, 1809)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이 구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새로 틀을 짜고 오세창이 발문을 썼다. 18세기 말 당시 사회 풍속이 현재의 스냅컷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려져있다. 《풍속도화첩 / 혜원전신첩》은 국보 135호로 지정되었다.김홍도가 서민의 일상을 풍속화로 사진처럼 보여줬다면, 신윤복은 인간 누구에게나 잠재되어있는 성性과 유흥遊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보여줬다. 


왼쪽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682&menuNo=200018 

신윤복 <주사거배> 《혜원전신첩》 종이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CC BY 공유마당

작은 크기에 전경과 배경, 많은 등장인물, 채색, 제시,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오른쪽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661&menuNo=200018 

신윤복 <야금모행> 《혜원전신첩》 종이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CC BY 공유마당

다른 화원들의 풍속화는 거의 담채(연한 채색)인데 반해 혜원의 채색은 짙다. 청홍대비가 짙고 뚜렷하다. 인물을 부드럽고 여린 필치로 그리면서 청록 또는 빨강, 노랑 등 화려한 채색을 위주로 구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윤복’하면 <미인도>를 연상한다. 여인의 전신 초상화 <미인도>는 19세기의 미인도 제작에 전형典型을 제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윤복'하면 <미인도>를 연상한다. 여인의 전신 초상화 <미인도美人圖>는 19세기의 미인도 제작에 있어 전형典型을 제시했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639&menuNo=200018 

신윤복 <미인도> 견본채색.  114.0×45.5cm 보물 제1973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CC BY 공유마당.


신윤복의 그림에는 짤막한 찬문贊文이 곁들여있는 경우가 많다.  신윤복은 그림 뿐 아니라 시를 잘 짓고, 서예도 잘 했다고 한다. 그의 여러 그림에 제화시題畵詩를 써넣은 것을 보면 그가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인도>의 제화시를 보자.  “盤薄胸中萬化春반박흉중만화춘, 筆端能言物傳神필단능언물전신(내 가슴속에 춘정이 가득하니, 붓 끝으로 겉모습과 함께 속마음까지 그려냈네)". 그는 칠언절구의 한시로 자신의 심정까지 드러냈다.

신윤복 당시 도화서는 한양의 중심가인 운종가와 광통교 인근에 있었다. 그 지역엔 양반들과 부유한 중인들의 풍악을 울리며 노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띠었다. 부자들의 기방출입도 잦아서 신윤복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 채색에 뛰어난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혜원은 원색의 옷을 입은 기녀들의 모습을 원색 그대로 그렸다. 

다양한 색을 사용하려면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들어온 안료를 이용해야 한다. 신윤복은 역관을 지내는 사촌형을 통해 안료를 구할 수 있었고, 그림에 채색을 짙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은 낙관이 있지만 연대기를 밝힌 작품이 거의 없다. 작품의 정확한 모사시기나 화풍의 변화를 추적하기 어렵다. 그의 사망연도도 확실하지 않다. 그의 묘소가 조성된 것은 2002년 10월 20일이다. 그의 후손들이 9대조 안협공 묘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에 혜원 신윤복의 설단묘設壇墓를 조성하여 참배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신윤복의 그림을 모아 『도화서 화원 첨절제사 혜원 신윤복』(고령신씨안현공파종중회, 2015)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림과 함께 그림 속 모든 동작마다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 책이다. 

조선에 풍속화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그림 속에서조차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여인들, 기녀들을 버젓이 전면에 내세워 주인공을 만들어준 풍속화의 화원들, 그들은 진정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아닐까?


낯선 말 풀이

설채設彩         -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함.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508026_001  

2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509001_004 

3 http://db.itkc.or.kr/inLink?DCI=ITKC_IT_V0_A05_12A_20A_00180_2010_030_XML 

4

http://kyudb.snu.ac.kr:80/series/directView.do?itemcd=NGK&bookcd=GK13030_00&pyear=1788&pmonth=09&pyun=0&pday=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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