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카톡 왜 안 봤어?”
“...”
“왜 안 봤냐고.”
그녀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엉엉 운다. 그냥 운다. 묵힌 감정이 담긴 것이 아닌, 그냥 화가 나서 우는 소리다. 그 소리가 담장을 넘어 빽빽 거린다.
‘어떤 상황이지? 창문을 열어볼까?’
아침 7시 45분. 침대 옆 창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이 깬 후, 의도치 않게 청취자가 된 K가 창문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춘다. 창밖의 누군가에게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방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온 동네가 들으라는 듯 소리치는 창밖 이야기가 궁금했다.
“요구르트 먹으라고 했어야지”
그녀의 목소리만 들릴 뿐 상대방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통화 중일 거라 짐작됐다.
‘연인? 친구? 도대체 누구랑 통화하는데 아침부터 격앙돼있을까?’
“사과하라고! 미안하다고 말하라고! 요구르트 먹으라고 말해야 했다고! 카톡 왜 안 봤어? 왜? 왜! 사과하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빨라졌지만 격앙된 톤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니, 상대방이 그럴듯한 이유를 댄 것 같다.
‘이게 무슨 상황? 갑자기 요구르트는 뭐야?’
어이없는 전개에 청취 의욕이 상실된 K는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K는 현관문을 닫고 거리로 나오자마자 잊고 있던 격앙된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 앞에서 울며 통화했을 텐데.’
그녀 아니, 어린 여학생으로 짐작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골목 좌우를 살폈다. 그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사과하라고! 미안하다고 말하라고!’를 외치던 그녀, 아니 그 어린 여자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그녀들의 쇼미 더 연애
“사과해봤어?”
퇴근하면 K는 고등학교 동창인 여진의 카페에 들리곤 하는데, 오늘은 온종일 목에 걸려 있던 생각을 풀어놓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카페를 찾아와 커피 주문보다 먼저 답을 주문했다.
“야, 내 인생이 사과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잘 먹어서 죄송합니다. 취해서 죄송합니다.”
여진의 어이없는 대답에 K는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웃음으로도 지울 수 없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K는 여진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사과해 봤다고? 하긴 네 인생은 좀 사과를 해야 해. 나한테도 사과할 게 있을걸? 오늘 인생 장부 정리 좀 해보자."
"네가 나한테 사과할 게 더 많을 텐데, 각오해라. 기억 소환해볼까?"
K와 여진은 20년 지기 친구 사이라 비밀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타인은 타인일 뿐이라서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다.
"사과를 못 받은 적은?"
"받아야 하는데?"
"응. 너한테 잘 못 했는데 사과하지 않은 사람."
"아까부터 사과 타령이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없어. 사과 못 받은 적 있느냐고! 자꾸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생각 좀 해봐."
여진은 친구의 재촉이 의아했지만 더는 따져 묻거나 장난치지 않기로 했고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K도 그녀의 친구도 커피잔 속에 기억을 펼쳤다.
"있다. 있어. 나쁜 놈."
여진이 찾아낸 사과 안 하고 튄 남자를 K도 알고 있다. 연분홍색 행주로 커피잔을 닦던 여진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사과 안 하고 튀었잖아. 원래 연애의 끝이 그런가?"
여진이 독백처럼 말했지만, K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을 했다. 마치 연애 전문 해설자같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연애 다 경험자로서 답을 한다면, ‘그렇다!’라고 할 수 있지.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리라! 그게 남녀의 연애야."
"그 남자가 아니라 연애가 나쁜 거네?"
"나쁜 건 남자도 연애도 아냐. 그놈이지. 그래도 여진아, 너는 지금 잘살고 있잖아. 한동안 술 먹고 지랄했지만. 아휴, 그때 내가 너 뒷감당하느라 힘들었다."
"이별 애도 기간은 난데 술은 네가 더 마셨어."
"사랑했었는데 그놈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그리울까?, 날 기억은 할까? 그런 말 무한 반복 들어봐라. 술이라도 마셔야지."
K가 이렇게 말하는 걸 한 두 번 들은 게 아닌 듯 여진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고갯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일 년 정도 술 마실 이유가 충분해서 좋았는데 이제 너랑 나랑 노처녀 되니 커피만 마시네."
"난 연애 일 년 쉬었어."
"K야 난 그놈 튀고, 삼 년째 휴지기야."
"우리 연애 세포가 죽은 건가?"
K는 연애 세포만 죽은 게 아니라 커피잔도 어느새 비어있었다. 여진은 K의 커피잔에 커피를 채우며 말했다.
"난 연애 세포 살아있어. 썸을 타다 워너비 리스트에 부족하면 탈락시키는 것뿐이야. 쇼미 더 연애를 나 혼자 하는 스릴을 즐긴다고 할까?"
"쇼미 더 연애. 정말 그걸까? 우리의 연애가 멈춘 건 그러니까 썸은 타는데 연애하지 않는 건 우리의 세포가 노화돼서가 아니고 이전의 연애에서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서 아닐까?"
"해결되지 않은 상처? 난 미련 없는데?"
"미련이 아니고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서 체한 것처럼 얹혀 있는 거 말이야."
"소화가 안 돼서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거? "
"그래 이제 얘기가 통하네. "
퇴근길에서도
53번 버스는 늘 지나치게 사람이 많다. 삶 속에서 내가 존중받지 못하는구나 오해하게 만드는 저녁 7시 38분 53번 버스 안.
‘여진의 카페에 좀 더 있을걸’하고 매번 후회하면서도 K는 언제나처럼 붐비는 퇴근길을 강행하곤 한다. 무리를 일탈하지 않으려는 겨울 철새처럼.
버스 안에서 등이 밀쳐지며 구겨지듯 몸을 굽히길 몇 번 하고 나니 아침에 들은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사과해. 미안하다고 말하라고!”
얼마나 밤새 속상했을까. 아침이 되길 얼마나 기다렸을까. 서둘러 등교 준비를 하고 친구 또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며 그녀는 무엇을 원했을까? 밤새 정주행 한 그녀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사과를 받았을까? K는 아침에 있었던 엉뚱하고 절절한 상황에 마음이 쓰였다.
‘사과…. 그렇게 중요한 건가?’
사방을 둘러싼 사람들을 매몰차게 밀쳐대고 내렸다. 평소보다 더 거친 그녀의 몸짓이다. 그녀의 걸음을 안내하는 낙엽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원을 그리다가 위로 솟는 척하더니 이내 K의 신발을 감싸듯 휘감아 안고 다시 성큼 뻗어 앞으로 재촉하길 반복했다. 블루스를 추는 것 같던 낙엽은 이 길을 같이 걷던 그와의 이별을 떠올리게 했다.
예의 없는 이별에 대한 기억
“잘 있네? 넌 잘살고 있을 거 같았어.”
술 취한 그의 목소리. 예고편도 없이 연락이 두절된 후 한 달 만이다.
“내가 잘 지낸 거 같아? 내가 얼마나 슬픈지 알기나 해?”
“잘 지내는 거 알아.”
그녀와 상관없이, 실제와는 다르게 그가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그녀의 안부는 정해졌다. 몇 분을 쿠키 영상 같은 대화가 이어지고 전화기는 꺼졌다.
그렇게 그녀와 그의 연애도 완전히 꺼졌다.
그 당시 K는 이렇게 쉬운 이별에 대해 충격이 컸다. 사랑을 배신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고 싶었다. 혼자 남겨두고 가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더는 전화하지 않았고 K도 돈 1억을 떼어먹고 튀는 것과 3년 사귀고 튀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쁜 짓인지 분간이 안 가서 그 남자의 사과에 집착하지 못했다.
‘1억을 사기당한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맥락 없는 위로로 그 남자를 용서하려 애쓰기까지 했다.
낯선 이의 사기와 연인의 배신 중 어떤 것이 더 나쁜 일인지. 왜 사과를 못 받으면 삶이 소화불량에 걸리는지. 알지 못한 채 강요당한 이별에 적응하려 애썼다.
‘다친 감정은 사과를 받으면 지워질까?’
사과의 무게가 정해져 있어?
부드럽게 블루스를 추는 낙엽을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문에 이르렀다. K의 안전지대다. 오늘도 K는 답을 못 찾은 체 그녀의 방으로 숨어들기 위해 문을 여는데, 그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또 기억났다.
‘이쯤에서 소리치며 통화했겠지?’
K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그 어린 여자가 아직도 울먹이고 있을 것만 같아서 조바심까지 났다. 골목 끝 가로등까지 걸어가며 둘러보았다. 당연히 목소리의 주인공은 없었다.
‘오늘 사과를 받았을까?’
K는 그 어린 여자가 사과받고 요구르트도 먹었기를 바라고 있다.
불편해도 해야 할 예의
앞뒤 상황도 모르는 사소한 통화 내용에 온종일 얽혀 들어가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그럴만한 일’이라는 평가는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자신을 두둔했다. 상처는 지극히 개인적인 저울로 무게를 잴 수 있는 거니까.
나,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상처의 무게를 경험해 본 사람답게 얼굴도 모르는 그 어린 여자아이를 울게 한 불편한 일이 정당한 사과를 받고, 상처가 안 되기를 바라며 두리번거렸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진의 전화는 언제나 마음을 안심시킨다.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던 K가 환하게 전화를 받는다.
“어, 절친”
“사과받는 거 중요한 거 같아. 절차야 절차. 불편해도 해야 할 예의를 다해야 했어.”
“아직도 그 생각했니?”
“옛 남자 친구는 공소시효가 끝났고 앞으로 다가올 인연은 만남도 이별도 예의를 주고받아야겠어.”
“살아가는 게 열정보다 예의인가?”
“거기서 열정이 왜 나와? 사과할 건 하고, 받을 건 받고 살자니까. 너부터 시작해볼까? 나한테 잘해라. 인생 장부 정리 들어가면 넌 삼 박사일 사과해야 해 ”
K보다 먼저 여진이 질문의 답을 찾았나 보다. 언제나처럼 여진이는 단순하게 정리를 잘한다.
“됐고. 인생이 사과 안 되게 잘해라. 하하. 잘 자.”
친구와 전화를 끊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비로소 그때 기억이 났다.
K도 여기서 빽빽 거리며 소리쳤었다.
“미안하다곤 해야지 ”
“미안하다고 하면 일어난 일이 안 일어난 게 돼?”
“아닌 거 알아. 그런데 적어도 내 마음이 비극이 되진 않아!”
상처는 옅어지고 지워지는데 비극은 더 큰 비극으로 자란다.
이별도 용서도 강요당해왔다. 이젠 여진의 말처럼 절차에 따라 사과부터 요구해야겠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소한 상황에서 비롯되니까.
현관으로 들어서니 자동센서 등이 환하게 켜진다.
“미안하다고 하면 일어난 일이 안 일어난 게 돼?”
“아닌 거 알아. 그런데 적어도 내 마음이 비극이 되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