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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Mar 13. 2021

장르가 다른 연애 2

우리 연애 시작할까? 플레이리스트가 다르면 어때

그 트로트맨이 정말 트로트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마친 후 기타를 들고 온 친구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니 이런저런 사심이 사라질 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고 우리는 모두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진짜 동기들과 M.T를 온 것만 같았다.

'내 오해였어.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했던 거야. 그냥 친구.'   

이렇게 나긋하게 모닥불과 기타 연주에 긴장이 풀려 갈 무렵 누군가 제안을 했다.     

“각자의 휴대전화기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애창곡을 부르는 거 어때? ”     

“좋아, 음악으로 자기소개네?”

"좋아, 각자의 세상을 음악으로 펼치기?"     

동의는 쉽게 이루어졌고. 나도 흥미로웠다. 나이는 같지만 사는 지역도 직업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를 들려준다니 벌써 가까워진 것을 넘어 서로에게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 제안을 한 민영이가 먼저 곡을 틀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광고 카피라이터라는 멋진 직업을 가진 그녀의 선곡은 최신곡일 줄 알았는데, 오래전 발표된 스팅의 잉글리쉬맨이었다.      

'I don't take coffee. I take tea, my dear.

I like my toast done on one side.

And you can hear it in my accent in my talk.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아임 언 잉글리쉬맨 인 뉴욕' 부분을 떼창 할 땐 분위기가 21살의 낭만으로 데려다 주기에 충분해졌다.

이어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근육 좀 있는 모임 장이 GOD의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2000년대 히트곡 메들리가 이어졌고 우리의 떼창은 계속됐다. 같은 노래를 듣고 부르고 자란 동갑끼리 부르는 노래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이어졌다. 밤을 노래로 수놓는 목소리가 웃음소리처럼 퍼져갔다.

빅 마마의 '체념', 이 범수의 '보고 싶다'가 이어졌고 누군가 프리스타일의 'Y'를 부를 땐 거의 광란의 콘서트장 같았다.  

'Please tell me why 왜 나를 떠나갔어

Please tell me why 사랑하는 나를 두고 tell me

Please tell me why 내게 다시 돌아와 줘

지난 아픈 기억들은 모두 잊고서 

우리 다시 시작해 Baby      

My baby I love you so much 

forever you and I

I love you oh I love you so much 

forever you and I'

39살 다운 플레이리스트가 밤공기에 조명을 켜 둔 듯 공기마저 반짝거리게 했고 우린 고개와 어깨를 좌우로 부드럽게 리듬을 탔다. 리듬이 유연해서 마음도 유연해졌다.      




그렇게 분위기가 낭만 그 자체였을 때, 그 남자의 차례가 됐다.     


내 이상형과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데도 시야에 들어온 이상한 남자의 선곡이 궁금해서 귀를 쫑긋하고 집중했다. 믿을 수 없는 선곡이었다     

'만약에 가 여기서 왜 나와? 태연의 만약에도 아니고.'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 할 만큼 인기를 얻고 있지만, 이 분위기에 트로트가 웬 말? 그것도 최신곡도 아닌 곡을 부르다니 분위기 파악이 안 된 선곡에 짜증까지 났다. 그는 언제 적 노래인지도 모를 '만약에'란 곡을 너무나 진지하게 불렀다. 

'만약에 당신이 그 누구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얼 할 수 있나. 

텅 빈 세상 살아가는 이유가 만약에 너라면 어떡하겠니? 

사는 동안 단 한 번의 사랑이 만약에 너라면 허락하겠니?'


못마땅한 나와는 달리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나왔고 벨트 안으로 티셔츠를 집어넣은, 새마을운동 시대 패션이 저랬을까 싶은 자태를 뽐내기라도 하듯 핸드폰을 마이크 삼아  후렴까지 의기양양하게 불렀다.    

우렁차게도 불러대는 '만약에 당신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리오.'는 노래가 아닌 구호 같았다.  

어느새 몇몇 친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고개와 어깨가 아닌 엉덩이를 흔들기도 했다.     

낭만에 유흥이 더해지고 있었다.     

낭만적이라 딱 좋았던 플레이리스트였는데, 내 취향과는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 후 몇 곡은 더 유흥에 맞는 노래들이 이어졌고 내 차례가 됐을 땐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분위기가 돼버렸다. 이 흥겨운 분위기를 발라드로 끊을 배짱이 누가 있을까? 내 플레이리스트를 뺏긴 건 그 남자 때문이다.   

내 앞 친구가 'NOBODY'를 부르는 순간 '아, 오늘 밤은 여기까지'란 생각이 들었다.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를 부르면 다 같이 'But I won't hesitate no more no more. It cannot wait I'm yours'를 떼창 할 상상을 하던 나는 솔리드의 '천생연분'을 불러야 했다. 그것도 내 플레이리스트에도 없는 곡을.    




겨우 부르고 난 후 잡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산책하러 나갔다.     

캠핑장을 둘러싼 숲길이 분위기를 만들어 주길 바라며 걷고 있으니 달빛 덕분일까.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몇 걸음 더 걸으니 나무로 가려서 안 보였던 왼쪽 길이 내가 걸어온 길과 이어져 하나의 길이 되었다.

길로 발을 내딛는데, 그 순간 왼쪽 길에서 그가 나타났다. 

어찌나 소리 없이 불쑥 나타났는지 놀래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아버렸다.  

“깜짝이야. 비명에 내가 더 놀랐다.”     

퉁명하게 말하며 일으켜주려 손을 내밀었지만 잡지 않고 혼자 일어났다.     

"왜 거기서 나와? 깜작이야." 

찌를 듯이 째려보며 말하곤 흙 묻은 바지를 털며 생각했다.

'따라온 건가?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그런 오해는 금방 깨졌다.     

"남자 숙소 앞에서 출발한 건데 넌?"

“난 여자 숙소.”    

산책로 입구가 두 곳이었고 두 개의 길은 이곳에서부터 한 길로 만나는 거였다.     

“노래 잘하던데? 주은이 맞지?”    

“응.”     

“이 모임 처음 나온 거지?”     

“응 산책 잘해.”     

출발이 달랐는데 굳이 같이 걷고 싶지가 않아서 짧게 대답하고 앞질러 걸었다.     

달빛 아래 산책의 낭만도 또 그 남자 때문에 깨졌다.     

뒤에 트로트맨이 따라오는 게 신경 쓰여서 걸음도 생각도 편하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여행의 밤에 자유로운 생각도 못 하고 뒤에 걸어오는 촌스러운 남자 신경을 써야 한다니. 

오늘도 또 글렀다.     


생각이 분에 차오르는 만큼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주은아, 주은아!”     

난 못 들은 것처럼 더 빨리 걸었다.     

그러나 그가 세 번째 주은이를 외쳤을 땐 돌아봤어야 했다. 멈추지 못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세 번째 '주은아'가 들렸지만 이미 도랑 속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부른 이유는 귀찮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     

어둠 속에 빨리 걷느라 못 본 작은 물웅덩이를 피하라는 친절한 신호였다. 

움푹 파인 흙길 위에 물이 고였고 높낮이가 다른 길은 덫처럼 내 발을 낚아채서 넘어뜨리며 산책로 옆 도랑으로 나를 처박아 버렸다. 게다가 흙탕물까지 끼얹어 버렸다.     

'오늘 왜 이래?'  

아픈 걸 티 낼 겨를도 없이 창피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제발 나를 모른 척하고 지나가 주길 바랐지만, 그는 달려와서 일으켜주었다.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괜찮아 보이니?”     

쏘아붙였다. 좋아하는 곡도 못 부르게 만들고, 즐기는 산책도 망쳐 놓더니 이젠, 흙탕물까지? 이 모든 게 이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   


부축을 받고 일어났지만 혼자서 걸으려 한 걸음을 떼는데     

“악”     

왼쪽 발목이 너무 아팠다. 오래전 다친 후론 조금만 삐끗해도 덧나곤 했는데 오늘 또 사달이 난 것이다.     

그의 팔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걸을 수 있겠어?”     

“걸어야지.”     

다시 발을 움직였지만,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넌 내게 클로즈업됐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거니. 난 왜 네 부축을 받아야 하고 놀러 온다고 새로 산 옷엔 흙탕물이 튄 거니. 왜?'   

복잡하고 어이없는 나는 아랑곳없이 그가 물었다.     

“안 되겠다. 업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말보다 더 격한 거부를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는 이미 업어줄 자세로 등을 굽혀 내밀고 있었다.     

'촌스럽고 이상한 녀석, 게다가 나쁜 녀석이면 어쩌지?' 

쉽게 업히질 못해 망설이는데 그가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야, 허리 아파. 빨리 업혀.”     

언제 봤다고 '야'라고 하냐고 따지려다가 마치 다음 순서가 된 것처럼 서둘러 업혔다.     

'잠깐 업히는 거니깐 괜찮아. 어쩔 도리가 있겠어? 이런 상황이 되면 상황을 따라야지.'    




그의 등에 업혀 왔던 길로 돌아갔다. 다시 양 갈래 길이 나오자 그는 여자 숙소 쪽 길로 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몇 분을 걸어가는데, 아니 업혀가는데 그의 등이 넓고 따스했다.     

'이건 또 뭐지? 왜 등이 포근한 거야?'    

그는 말없이 우렁찬 목소리만큼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등이 흔들려서 자장가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몸으로 들려주는 달밤의 자장가. 어느새 눈을 감은 난 입가에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이 남자 설마 운명?'     


그 순간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약에 당신이 그 누구와 사랑에 빠지면."   


아, 제발 낭만을 깨지 말아 줘. 트로트맨.  

   

"텅 빈 세상 살아가는 이유가 만약에 너라면 어떡하겠니

사는 동안 단 한 번의 사랑이 만약에 너라면 허락하겠니"       

낭만을 깨지 말라는 소리 없는 외침은 그의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고 그의 등에 업혀 듣는 노래는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이 밤과 잘 어울렸다.    


'이 노래 은근히 좋은데? 내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볼까?'

이 길이 계속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고개를 그의 등으로 파고들며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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