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아직도 기대해?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밴드에 모여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고, 우정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만들어진 공동체, 참 아이러니야.”
“뭘 복잡하게 생각하니? 너랑 나 외로웠잖아. 나이 먹으니 친구 만나기도 어려웠는데 동갑끼리 얘기 잘 통하고 이렇게 캠핑도 하고, 신나기만 하는데?”
“정확히 말해라. 여기 우정이란 포장지 덮고 속엔 ‘애인 구함’ 아니야? 여기서 진실한 사랑을 찾는 얘가 몇 퍼센트겠어? 유부남, 유부녀들도 있던데. 애인이 필요한 심장에 구멍 난 인간들끼리 땜질하려고 우글거리는 거야.”
“넌 떠들어라. 난 여기서 애인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영은이는 애인이 캠핑장 안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차에서 짐을 내리느라 분주한 나를 남겨두고 신나서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고 결승전 테이프를 끊으면 사랑하는 연인이 와락 안아주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름의 뒷글자가 ‘은’이라 쉽게 친해진 우리는 ‘은은한 자매’라 불렸지만, 은은하지 않은 영은으로 인해 요란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오늘도 그 연장선이다. 최근에 가입한 동갑 모임에 푹 빠져있는 것도 굳이 나를 끌고 온 것도 영은 이다웠다. 지금 뛰어가는 모습도.
대학교 때 MT (MEMBERSHIP TRAINING) 다니고 남자 선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던 것은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는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땐, 적어도 나의 20대 세상에는 남자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삼십 대 그것도 후반의 지금엔 아니다.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라 불린 녀석 중 아무도 곁에 없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아내의 품에서 살아가는 삶엔 여자 친구는 가당치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39살 남녀가 친구라고? 얼굴도 본 적 없는 랜선 인연을 친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묶어 MT 흉내를 내며 모이다니. 시꺼먼 속내가 뻔하다. 나도 알고 여기 모인 모두도 다 안다.
'이거 뭐지? 왜 재밌는 거지?'
캠핑장 도착하고 1시간 뒤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진행됐다.
삐딱선을 탄 의혹과는 달리 점점 모임에 빠져들고 있었다. 캠핑이 주는 호감이 더해진 탓도 있지만 역시 동갑이라 편한가 보다. 마치 새 학기 첫날 교실 풍경 같다.
투덜거렸던 게 무색하게 처음 만나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다가 맞은편에서 남자들에 둘러싸여 캠핑장을 날려버릴 듯 웃고 있던 영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오길 잘했지? 아모르파티!’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됐거든.'이라고 눈으로 쏘아붙인 후 고개를 돌렸지만 낯선 이들과의 익숙한 시간이 싫지 않았다. 기분 좋았다.
해맑은 웃음이 돌림 노래처럼 울리는 걸 보면 시꺼먼 속은 나뿐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동갑이 모인 그 자체가 즐거운 건지도 모른다.
좋은 우정이란 공동의 콘셉트에 모두 선한 표정으로 선한 행동으로 부지런히 캠핑 준비하는 걸 지켜보며 불쑥 초대된 나와는 달리 모임을 준비하느라 애쓴 흔적들이 보였다.
'이 친구들 장난이 아니야. 모임에 진심인가 봐.'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의혹을 품었던 게 미안해졌다.
랜선 모임이지만 이미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친해져 있는 무리도 있었고 랜선에선 친했지만, 오늘 처음 얼굴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이미 친구라는 것이다. 밴드에서 글과 사진으로 소통한 것만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오랜 친구 같다는 게 신기했다.
왁자지껄 교실 같기도 대합실 같기도 한 산만하지만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고기를 굽고, 누군가는 채소를 씻고, 제법 여행 좀 다년 본 나이 39살답게 각자 역할이 정해진 듯 식사 준비도 식사도 순조로웠다. 어느 정도 배가 찰 시간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임 장이 본격적인 순서를 시작했다.
MT의 꽃인 자기소개, 기타와 떼창, 장기자랑 그리고 적당한 취기가 시작된 것이다.
먼저 큰 원으로 마당에 둘러앉아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 이쁜데? - 나이 들어 보이네? - 제법 스타일 있는데? - 호감 가는데?
외모로 전해지는 가치를 평가하며 박수로 호응했다. 내 차례가 됐을 땐 수줍은 척과 당당함을 버무려 자기소개도 했다. 한두 번 해본 자기소개가 아니었지만 이번엔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었다.
'남자 친구든 애인이든 오늘 한 놈만 걸려라.' 하는 속마음이 들키지 않을 만큼만 매력적으로 말이다.
소개를 마치고 환영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는 짧은 순간에도 원안에 있는 모든 남자의 시선을 파악하는 초능력을 발휘했다.
초능력에도 불구하고 딱히 특별한 징후는 감지되지 않았다. 역시나 영은이한테 쏟아진 환호성만큼은 아니다. 은은한 건 늘 내 몫이다.
‘사실, 나도 애인이 생겼으면 해, 이성 친구라도 말이야.’
이 십 대와 삼십 대의 차이일까? 아니 더 정확히는 삼십 대 초와 서른아홉의 차이일까?
퇴근 후가 심심해졌다.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퇴근 후나 주말이면 친구들과 모이곤 했고 뭔가를 했다.
영화를 보든, 치맥을 마시든, 쇼핑하든 혼자가 아니었는데 여섯 명이 다섯 명이 되고, 다섯 명이 셋이 되더니
혼자 영화를 보면서 혼술을 마시고 쇼핑은 인터넷으로 하고 애써서 약속을 잡아야 누군가와 주말에 뭔가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여기 모였나 보다.
누군가와 뭔가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같았나 보다.
7살 땐 놀이터에서 해 질 녘까지 놀아도 지치지 않았고, 23살엔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녀도 할 것도 갈 곳도 넘쳤고, 31살엔 영화를 밤새워 봐도 볼 영화도 할 얘기도 많았던 건 친구가 있어서 아닐까?
친구가 있어서 가능했던 시간이 그리운 나이 39.
'오늘은 주말을 함께 보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동성 친구도 좋지만 이왕이면 이성 친구가 생겼으면 했다. 시꺼먼 속내가 뻔하다며 투덜거렸던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던 이유는 그게 내 마음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뻔한 속마음이 내겐 들켰지만 다른 사람에겐 들키지 않길 바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후보는 많은데, 1박 2일 동안 그 일이 일어날까?'
그때,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한 사내가 쑥 들어왔다.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면서 그가 클로즈업돼서 다가왔다. 마치 그 위에 핀 조명을 켜 둔 것처럼 두드러져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