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짠 Mar 26. 2021

시간의 언어 3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구해주었지만 정작 외로움에선 구하지 못했다

오늘도 그날처럼 나를 구해주었지만 남과 다를 바 없이 소통이 박제된 우리는 구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연인은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어가며 왜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될까? 

그는 직장을 전쟁터라 불렀고, 매일 전투하느라 바빴다. 바빠도 너무 바쁜 그. 

우린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한집에 살아도 다른 언어를 쓰는 이방인으로 사는 건 냉동 창고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고 얼음이 파편처럼 꽂혀 몸과 마음에 상처를 냈다. 상처에는 독이 자라기 시작했다. 

독은 삶 속 여기저기로 파고들고 퍼져나가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앗아갔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구해주었지만 정작 외로움에선 구하지 못했다.    


왜 차가웠던 날로 돌아온 걸까. 사고 나기 전이나 둘 사이가 나빠지기 전으로 돌아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에게 섣불리 시간을 이동해 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교통사고를 내고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는 십 년 전처럼 아무 질문도 탓도 하지 않은 채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지난 상처들과 지난 애틋함이 심술궂은 심장을 뚫고 무성하게 돋아났다.      

‘39살의 그를 다시 보다니.’

세월을 거슬러 함께 있게 된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진 모르지만, 그때와는 달라야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이런 사고를 내고도 미안해하지도 반성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자기 연민에 빠져서 하염없이 서글프기만 하고 누군가가 사랑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외로움에서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면 칠수록 외로움은 독이 되어 나와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는데도 왜 그토록 대책 없이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까. 

다른 선택을 할 순 없었을까.

 

이번엔 사고를 내서 미안하다고, 아니 사랑이 멀어진 빈자리를 당신 탓으로만 채워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아무 말 없이 운전하고 있는 남편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민지 아빠, 사고 내고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게 말이지.”

그런데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진동 소리가 침묵의 공간에 자지러지듯 울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퉁명스럽게 던지듯 말했다.

“전화받아.”

그 남자의 전화였다. 

‘하필 이런 순간에.’

부르르 손이 떨렸다. 전화기를 꺼내서 거부 버튼을 누르고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그래, 그 남자 때문이었다. 

모든 불행의 본색이 드러난 것은 그 남자의 등장부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전화를 하다니.


외로움을 불행으로 만든 첫 선택은 그 남자였다. 잘못된 선택은 파괴의 파장을 일으켰다.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화가 나서, 미쳐서 널뛰듯 운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잘못된 선택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과거 파먹기를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니 딸을 만날 수 있다는 반가움이 찾아들었다.

‘괜찮아. 이번엔 그렇게 안 하면 돼. 다르게 살면 돼.’

십 년 전을 오고 간 하루의 긴장감이 피곤했는지 달리는 차 안의 일정한 흔들림이 스르륵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전 02화 시간의언어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