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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Mar 26. 2021

벚꽃처럼 네가 나에게로 왔다

그날 그는 눈부셨다. 그가 나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처음 만난 날이 첫 소개팅 날이다.

“드디어 우리도 소개팅하는 거야?”

“예쁜 얘들만 하는 거라고 정해놨어?”

“남자애들이 좋아할 타입이 아니라서.”

“넌 은근 외모 콤플렉스 있더라? 고등학교 때까진 여자가 아니라 학생이야. 대학 가면 외모가 진화된 데,

거의 인류 진화 수준이래, 그러니까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외모는 진화되는 거라고. 지금은 안 꾸민 거지 못생긴 게 아니야.”

“그럼 오늘은 포기하고 대학 가서 소개팅할까?”

“기회는 잡자. 일단 나가는 봐야지. 대학생하고 사귀는 미란이가 주선하는 거니까. 기대되지 않아?”

정윤이와 나는 사계절 옷을 다 꺼냈고, 거울 앞에서 그 옷들을 번갈아 입어가며 멋을 부린 후 약속 장소로 갔다. 두 소녀는 촌스러움을 차려입었지만, 설렘은 풍선처럼 날아오를 듯 팽팽하게 차올랐다.


넓은 홀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을 향해 정윤이와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이문세의 ‘소녀’가 들려왔다. 마치 나의 소개팅을 축하하듯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들리니 '드디어 내가 찾던 백마 탄 미남을 만나는구나!' 하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 둘, 셋! 딱 삼 초 후 기분 좋은 예감은 산산이 깨졌다. 남학생들을 수줍게 바라보자마자 ‘범생이.’라고 소리칠 뻔한 것이다.

연예인급 외모를 바란 건 아니지만, 이런 수수함은 예상 못 했다. 설렘은 금세 매듭 풀린 풍선처럼 바람 빠지고 말았다.

인사가 오고 간 후 남학생 물건을 선택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소개팅 파트너를 정했다.

나는 가장 모범생다워 보이는 남학생과 짝이 됐다.

'최강 범생이 파트너라니. 망했다.'


긴장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부렸다.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진화되지 못해서 아직은 안 잘 생긴 남학생이 말을 걸었다.

“난 너랑 파트너 되고 싶었어.”

"뭐래?"

하마터면 입속에 있던 커피가 뿜어져 나올 뻔했다.  

            

고등학교 졸업 기념 소개팅은 재철이란 남학생 덕분에 '나도 매력 있어.'라는 희망을 품게 했지만 한 번 더 만나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며 서로의 대학 생활을 응원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진화될 나에겐 환상적인 남자가 곧 나타날 거니까.

대학을 학문에 대한 기대감이 아닌 연애 파크랜드로 입장하는 정도로 여겼던 20살의 나였다.


“부산에 오면 연락해.”

예의를 차려서 말했을 뿐, 서울로 올라가는 명문대생과 부산까지 내려가는 평범한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라 여겼다

“재철아, 멋진 대학 생활해.”

환하게 웃으며 재철이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첫 소개팅 기억은 잊히고, 새내기 대학생활이 한 창이던 어느 날.

벚꽃잎 송이마다 분홍빛으로 물들어 반짝이던, 유난히 화창한 그날까지는 그 인사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날은 오후까지 강의로 꽉 차서 엽서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을 배신하고 꼼짝없이 강의실에 붙들려 있었다.

만약, 그날 수업이 없어서 캠퍼스에 없었다면, 그와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


“이 은영 학생 여기 있나요?”

조교가 강의실 문을 열고 나를 찾았다.

“네? 저요?”

조교를 따라 4층에 있는 과사무실로 향하는데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어? 재철아, 어떻게 여길?”

“보고 싶어서 왔어.”

벚꽃잎이 제때가 아닌 강풍에 흩어지며 후드득 꽃잎을 흩날리듯이 깜짝 놀랐다.


“캠퍼스가 좋네”

“너희 학교는 더 좋잖아.”

“부산 처음 와 봐.”

“멀리까지 찾아오고 반갑다.”

“보고 싶었어. 과사무실로 찾아가면 널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서 무작정 찾아왔어. 다행이야 만나서.”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신기하네.”

“너랑 파트너 되고 싶었다고 했잖아.”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서 친구 사이로 정리해야겠다고 짧은 순간 결론 내렸다. 나에게 다가올 꽃미남 백마 탄 왕자를 만나야 하니까.


적당히 반겨준 후 재철을 돌려보내야 하는데, 둘이 걷는 길마다 벚꽃이 왜 이리 유난스러운지, 마치 둘을 위해 분홍 양산을 펼친 듯했다.


“재철인 여자 친구 없어?”

정신 차리고 선 긋기를 했다.

“여자 친구 만들러 왔잖아.

순해 보이던 남학생이 진화된 건가? 남자답게 직진을 했다. 둘러대는 게 없이 직진이다.

난 아직 진화를 못 했는데 재철이는 서둘러 남자로 진화해버렸나 보다.

“난 그냥 친구 사이가 좋은데?”

“남녀가 친구 사이가 어디 있어? 난 널 소개팅으로 만난 거야.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이 여자구나!’ 했어.”

“처음 봤는데?”

“처음부터 네가 내 눈으로 걸어 들어왔어."

"뭐래? 내 비주얼이 첫눈에 반할 정도는 아니거든?"

"너 예뻐. 눈이 예뻐.”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는데? ”

“호기심 가득한 네 눈이 좋아. 활짝 웃는 것도 좋아.”

후드득 바람이 불더니 벚꽃잎이 살포시 어깨에 내려앉았다.


'몇 번이나 내 눈을 마주했다고 내 눈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거지?'라고 따져 물으려 했지만, 재철의 눈이 너무 진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진지한 눈은 뭐지? 앗! 나를 사랑하는구나!’

세상에 태어나서 내 눈이 예쁘다고 말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나의 가장 못생긴 부분에서 나의 가장 아름다운 면을 발견한 건 사랑이다.

'이런 게 사랑인가.'


“재철아, 나 좋아해?”

“응, 널 좋아해. 보고 싶었어. 계속 너를 만날 생각만 했어. 널 놓치면 후회할 거 같아서, 오늘 학교 가다가 서울역으로 간 거야.”

그 말을 하는 재철이 뒤로 벚꽃 양산이 펼쳐지며 그를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꽃은?”

그는 빈손을 들어 보였다. 민망했는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갑자기 내 입술로 그의 입술을 하강 비행했다.

‘어? 어...’


첫 키스를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하면 종이 울린다고 엄마가 말했지만 울리진 않았다. 아무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심장 소리만 두근두근 들려왔다.

'아무렴 어때? 종소리 따위 안 들려도 괜찮아. 키스가 달콤하니까.'


꽃다발 대신 첫 키스를 전한 그날 이후 그와 나는 서울과 부산을 오고 가는 장거리 연애를 했다.

교통비를 벌기 위해 그는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지만, 우리의 데이트도 쉬지 않았다.

연인은 헤어지기 싫어서 기차표를 더 늦은 시간으로 바꾸기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모른다.

출발하는 기차 뒤를 쫓아오며 사랑한다고 소리치던 그가 내 청춘의 전부였다.

사랑은 사람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그는 눈부셨다.

눈부신 그가 나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나의 첫 소개팅 소년은 나를 처음 사랑한 남자가 되었고, 우린 서로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연애 7년이 되는 봄날, 나의 남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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