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살이 설핏해지고 응달진 창가에는 찬바람이 인다. 콜 포비아(Call phobia)까지는 아니지만 거래처 통화는 기피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업무의 집중력이 떨어져 조퇴하고 싶은 날에는 더욱 그렇다. 금요일 오후의 영향일까? 마침 거래처에서는 전화 한 통 없다.
마음의 자유가 행동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9 to 6 근무자의 자기검열 때문만은 아니다. 갈 곳을 구속하는 사회 통제 분위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새들이 떠나간 숲만 적막하는 건 아니다. 발길이 끊긴 도시에서도 적막감을 느낀다. 조용히 Sinéad O'Connor의 노래 <A Perfect Indian>을 감상한다.
가까운 인척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한순간 동백꽃이 지듯이 떠난 자의 마지막 모습에서 미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는 동백꽃처럼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는 독백을 했을 따름이었다. 죽음을 생각할 때면 나는 자기최면을 건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철학 이론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후설의 현상학은 선험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는 눈에 보이는 현상적 사물은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간 사라지고 마지막엔 형이상학적인 영적 사물만 남는다는 것으로 플라톤은 외적인 세계만을 인정했다.
다정도 病 인양 하여 짧은 생애를 마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의 그림에서도 플라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손가락은 현상학에 가까운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플라톤의 손가락은 여전히 관념적인 외적 세계를 가리킨다. 이데아의 세계야말로 영원불변의 마지막 진리인 걸까?
세상에 영원은 없다.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수도자의 마음이 유독 부러워지는 날이다. 허황한 도심에서 6시를 기다리며 생각나는 시 한 편. 작사가였던 박건호 시인의 <저녁 6시>로 적막감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