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전혀 관계없어요. 척도의 이름이 조현병 척도일 뿐이에요. 생각을 왜곡하는 성향이 있단 뜻이에요.”
“...저 너무 놀랐어요, 선생님.”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다음 장을 볼까요? 불안 척도가 가장 높게 나왔고, 분노도 조금 올라가 있네요. 감정이 격해져 있다는 거겠죠. 마지막 장을 보시면, 다른 건 괜찮은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높게 나왔어요. 이건 이슬 씨가 잘 지내다가 갑자기 힘들어진 게 아니라 정신적인 외상이라 할만한 상처가 있다는 거예요. 아마도 성장 과정에서 생긴 거겠죠.”
”설명은 이 정도로 드리면 될 것 같고 조현병 아니에요, 이슬 씨. 단지 생각이 조금 부정적인 쪽으로, 안 좋은 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어 보여요.”
“그러면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려고 노력해야 할까요? 노력하다 보면 긍정적이 될까요?”
“긍정까진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해야 해요. 상대가 상대의 주장을 할 때, 나는 내 주장을 할 줄 알아야 해요. 내 입장을 더 생각하는 쪽으로요.”
내 입장만 생각해서 굴러온 곳이 여기지 않나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내 입장을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건 변명 아닌가? 막무가내고 아집 아닌가?
“저는요. 걔가 잘 못 지내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안 웃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저한테 미안해하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절대 안 행복하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저만큼 망가지면 좋겠어요.”
내 상처가 상대의 상처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것. 내 이야기가 상대의 이야기를 압도한다 여기는 것. 그런 게 내 입장을 변호하는 거라 믿던 때가 있었다.
내가 가진 불행으로 내 모든 행동에 면죄부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불행하니까 네가 이해해. 너도 힘들었겠지만 나만큼은 아니잖아. 누가 더 아픈지 순위를 매겼고, 기어코 우위를 차지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내 입장을 생각하라고?
“이슬 씨 마음이 정말 그래요?”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내세울 게 과거뿐이었을까.
그래서 내가 얻은 건.
“걔는요. 자길 괴롭히면서 버티거든요. 안 그러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눈물도 막 참아요. 편하게 울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자책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생일이 기쁘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걔가 힘든 게 싫어요.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방금 한 말을 이슬 씨 자신한테도 해봐요. 누가 더 불행한지 말고 누가 더 행복할 수 있는지 해봐요. 내가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 순 없지만, 내가 상대보다 더 행복할 수는 있거든요. 그건 할 수 있잖아요. 그게 더 쉽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슬 씨, 안 망가졌어요.”
늦은 사흘간의 여름휴가 이후 다시 병원 문을 연 첫날, 나는 두 시간을 기다린 마지막 환자였다. 여섯 시 반이면 문을 닫는 병원 시계가 일곱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생님. 원래 이렇게 늦게 퇴근하세요?”
“아니요. 오늘이 유독 이렇네요. 일찍 갈 때도 있어요.”
“힘드실 거 같아요. 잘은 모르지만요.”
“이슬 씨.”
“네?”
“잘 회복 중인 거 같아요.”
“제가요?”
“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마워요.”
이곳의 특이한 풍경 중 하나는 모두가 노크한다는 것이다. 이름이 불려 진료실로 들어가기 전, 두 번. 똑똑.
나처럼 누군가는 마음의 여유 없이도 앞사람을 따라 무작정 노크부터 할 테지만, 노크한 이상 두드릴 문은 계속 있을지 모른다. 두드려서 열고 또 두드려서 열다 보면 아주 환한 바깥일지도, 제일 가까운 타인인 나에 닿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