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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18. 2020

<연재소설> 영원의 정원 / 제6장 레이쇼와 프로포션

"예술적 안목이 좀 있는 거 같길래 물어본 거야."

*레이쇼(Ratio, 비율, 비(比)) 
**프로포션(proportion, 의복이나 신체의 전체와 부분 또는 부분 간의 비율, 몸매의 균형)  

  

  앞에 놓인 진토닉 잔 속에서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다. 물로 변한 얼음과 남은 술의 양을 가늠해본다. 그 '비율'을 혀로 측정해본다. 물과 술이 두 개의 악덕이라면, 중용을 잘 지킨 셈이다. 얼마 전 비대면 콘서트에서 신곡을 발표한 나훈아는 테스형(소크라테스)에게 하소연했지만, 나는 레스형(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50만원짜리 구두 - 내 생각이지만- 를 신은 여배우가 내 옆 자리에 앉는다.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묻는다.

  "엄지." 나는 내 이름을 말한다.
 

  내 이름을 듣고 웃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게 내 본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더 폭소했다. 성(姓)이 엄(嚴), 이름은 뜻 지(志) 자를 써서 '엄지'다. 이름을 말하고 나면 돌아오는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엄지? 그럼 공주야?' 

  '동생은 어디 갔어? 동생은 검지겠네?' 

  '자네가 모자를 쓰면 그럼 그건 골무인가?' - 본인은 기발한 농담 같겠지만, 자주 듣는 말이다.

  '엄씨 연예인이 누가 있더라? 엄용수?' - 여담이지만 내 또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엄용수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다음 엄앵란, 엄정화, 엄태웅, 엄지원 등을 떠올린다. 대부분 비슷하다. 유아인(본명 엄홍식)을 말하는 젊은 친구도 간혹 있긴 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웃지 않는다. "그럼 저는 검지할래요." 하고 말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안 그래도 동생이 검지냐고,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나는 말한다. 

"헨드릭스? 오이 키우는 상상을 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고 그녀가 내 술잔을 보며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내가 말한다. 그녀는 손바닥을 위로 치켜들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엄청 고리타분한 사람이네." 하고 말한다. 

  아무튼, 이게 그녀가 검지가 된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들은 뭘 떠올릴까-요?" 검지가 퀴즈를 내듯 묻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시작이 반이다?"

  "아니!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 의상과 헤어스타일, 수염을 떠올린다고! 그만큼 '패션'이 중요한 거야!" 검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느덧 존댓말이 사라진 대화가 오간다.


  "이 코트 어때? 스트레스받아서 이번에 옷을 많이 샀어." 검지가 말한다.

  "내가 뭘 아나?" 하고 내가 말한다.

  "예술적 안목이 좀 있는 거 같길래 물어본 거야." 검지가 말한다.  


  '너는 워낙 비율이 좋으니까'라고 말하려다 그만둔다. 여성에게 '비율'운운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극단 의상 선생님이 나보고 비율이 좋다고 하셨어." 검지가 뿌듯하다는 듯 말한다. 나는 아까 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을 금세 후회한다. '내가 아까 딱 그 말하려고 했는데!' 이런 소리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레이쇼검지'라고 불러야겠군."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내가 말한다. 

  "이럴 때는 ‘레이쇼’보다 ‘프로포션’이 맞지 않을까?" 검지가 지적한다. "그럼 그냥 '비율검지'라고 하지 뭐." 내가 말한다. "왜 자꾸 별명 부르는데?" 검지가 갑자기 날카롭게 변한다. "재밌는 줄 알고." 나는 약간 주눅이 든다. 속으로 '검지도 별명이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레시홀드(Threshold)와 레이쇼(Ratio), 어택(Attack)과 릴리즈(Release)*와 같은 용어를 떠올린다. 검지에게는 컴프레서가 걸려있는 것 같다. 스레시홀드의 값이 매우 낮다. 조금만 그 레벨을 넘어서면 컴프레서가 작동한다. 레이쇼, 즉 압축비는 높다. 어림잡아 4:1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어택은 짧고 릴리즈는 길다. 

  예를 들어, 내가 검지에게 '보고싶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스레시홀드)을 넘는 발언이므로 컴프레서가 작동한다. 레이쇼는 4:1이므로 '보고싶다'라는 네 음절이 '뽃'이나 '뿦' 같은 한 음절로 압축돼 버린다. 그 반응속도(어택)는 매우 짧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기까지(릴리즈) 오래 걸린다. 검지와 대화를 하면서 줄곧 내가 느낀 점이다. 검지는 나와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화가 멋대로 압축되어 버리는 그 컴프레서에 적응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깊숙이 파묻힌다. ‘자고 일어나면 많은 게 변해있을 거야.’ 하고 말하던 극장 관리인의 뾰족한 턱수염이 떠오른다.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꿈을 꾼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턱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특이한 염색을 한 건지 가발을 쓴 건지 머리가 하얗게 세 있다.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나는 작은 창문으로 그녀의 사무실을 들여다본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녀였는데, 이젠 능수능란하게 직장상사의 농담을 받아치고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나는 그녀의 동료 중 누가 볼까봐, 다른 볼 일이 있는 사람처럼 사무실 앞을 지나쳐 걷는 척한다.


"야! 부르는 거 안 들려?"

"아 미안, 이어폰 끼고 있어서"


  우리는 애들이 타고 노는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간다. 부동산 아줌마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집이 좋은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녀는 갈 곳 없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 놓고, '아버지가 노래방에 가셨는데 지금 케이블이 없다'며 다시 외출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나는 그녀의 방에 혼자 남게 된다. 첫사랑의 방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잠시 후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돌아온다. 그녀들이 갑자기 윗옷을 훌러덩 벗고 가슴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아랫가슴과 윗가슴의 비율을 따지고, 어떤 각도와 둘레를 비율로 환산한다. 유방과 유두의 비율을 따진다. 나는 그런 종류의 비율이 ‘레이쇼’인지 ‘프로포션’인지 헷갈려한다. 나는 그 장면을 피하지 않는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책상의 길이를 재듯 아무런 느낌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남자애들을 보는 것만 같다. 그녀들 중에서는 내 첫사랑 그녀가 역시 가장 예쁘다. 다시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든다. 그 '자랑대회'는 '몇 분'간 더 지속되었다. 그 '몇 분'이란 검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를 말한다.


  검지의 등장은 무슨 스위치를 작동시킨 것 같은 변화를 주었다. 한순간에 기준이 바뀌고, 가치가 변하고, 상식이 뒤집히는 거다. 검지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가슴을 흔들면서, 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이제 - 나의 첫사랑을 포함한 - 나머지 여자애들이 전부 다 시시해 보인다. 나는 검지의 모습을 부정한다. 그녀도 '가슴자랑'을 하는 부류 일리가 없다. 나의 기대가 산산이 무너진다. 나는 잠에서 깬다.


  이 꿈을 꾼 뒤로는 검지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검지에게는 실체가 없다고, 나는 종종 말한다.



각주

*컴프레서(compressor)라는 음향장비의 기본 파라미터(parameter), 컴프레서는 소리를 압축하여 깔끔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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