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들려온 목소리

소설가 박민규 님과의 만남

by 이손끝


작가의 목소리는 활자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봄날, 내가 사랑한 작가가 진짜 목소리로 내 앞에 나타났다. 박민규. 그 시절 작가지망생이었던 나는 그의 책들을 책장마다 품고 살았다. 어딘가 비어 있는 것 같은 나를 위로해 준 문장이, 숨 막히는 현실을 잠시나마 웃게 만든 장면들이, 내 청춘의 거의 모든 결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중앙대 강의실에 온다는 소식은, 내게 일종의 종교적 예고처럼 느껴졌다. 믿을 수 없어서 두근거렸고, 믿고 싶어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날의 강의실은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들고, 노트를 들고, 바닥에까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가장 설레는 마음을 가진 한 명이었다. 작가가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귀를 닫은 채 그의 모습만을 따라갔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에 집중했다. 손짓, 표정, 그리고 목소리의 결. 책에서 익히던 인물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의 나는, 듣는 것보다 믿는 게 더 어려웠다.


특강이 끝난 후 사인회가 열렸다. 나는 <카스테라> 책을 품에 안고 줄을 섰다. 그 책은, 나를 지탱해 준 책이었다. 무너질 때마다 꺼내 읽었고, 뼛속 깊이 웃거나 울고 싶을 때 꺼내던 책이었다. 작가는 내 차례가 되자 조용히 물었다. “뭐라고 써드릴까요?” 나는 그에게 이름만, 아무 말 없이 이름 세 글자만 적어달라고 했다. "00야!" 그가 펜을 들어 그 세 글자를 써 내려갔다. 아무 메시지도 없이, 그저 나를 부르는 말. 나는 그 공백이 더 좋았다. 어떤 응원의 말보다 더 길고, 더 넓고, 더 따뜻했다.


13년이 흘렀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키우며 글을 잊었다. 아니, 글이 나를 잊은 것 같았다. 육아와 생계 속에서 문장은 현실감 없는 기호가 되었고, 작가는 다시 책 속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 서평을 쓰기 위해 오래된 책을 꺼냈다. 그리고 그 책의 첫 장에서, 나를 불렀다. “00야!” 그날의 사인이, 그날의 공백이,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런 메시지를 담지 않았던 그 공백이, 13년 뒤의 나에게서 비로소 울림을 만들어냈다. "00야, 너의 글은 세상에 나왔니?"라고. "정말 쓰고 싶은 걸, 아직도 안 쓰고 있는 건 아니니?"라고. 작가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책 속의 문장이 아니라, 그가 내게 남긴 여백이었다.


나는 그날의 책을 조용히 사진으로 찍어 카카오톡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를 부르는 그 이름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과거의 작가가 아니라, 그 순간의 내가 지금의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00야’라고, 잊지 말라고, 멈추지 말라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말보다 오래간다. 시간의 공백을 지나, 나를 일으켜 세운 목소리. 나는 이제, 그 소리에 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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