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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Oct 09. 2024

환타

날씨가 안 좋은 날 산타를 마셔요.

 노오란 햇살이 유난스럽게 반가운 계절이다. 매년 이맘 때면 공기 속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는데, 올해는 경보 문자 한 통이 없다. 오호츠크에서 불어오는 바람 덕분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매년 봄이 꼭 올해와 같길 바라는 설레발이 앞선다.

지난 6월의 하늘

 아이를 맞이하러 가는 길. 포슬포슬한 공기와, 맑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햇살이 초여름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짙은 녹음 사이사이 피어난 능소화와 수국 덤불 쪽에선 때 이른 매미의 소리가 생명력을 더한다. 화창한 날씨에 한껏 취한 나는 가벼워진 옷차림만큼 산뜻한 마음으로 학교로 향한다.


 마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하교시간은 아이 마음이다. 그늘 한 뼘 없는 교문 앞에 서있다 보면 표정이 오만상이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묻는 나를, 아이가 오해하지 않도록 길 건너에서 기다린다. 같은 말도 표정에 따라 그 의도가 달라지니까.


 주변 엄마들이 하나 둘 떠나도록 기다리면 실내화 가방을 바닥에 질질 끌며 나오는 아이가 보인다. 햇살이 내리 꽂히는 하굣길 위에서 아이는 눈부신 빛을 이겨내고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핀다. 그 모습을 눈으로 한가득 담아 놓고 큰 소리로 아이를 부른다. 햇살 닮은 미소가 가득 차오르는 딸내미를 따라 나도 웃는다.

학교가 끝나면 산책이 낙이던 아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걱정 많은 나는 조그마한 그늘을 내어 주고 싶어 양산을 들고 요리조리.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욜랑욜랑. 제 마음껏 발걸음을 옮긴다.

“엄마, 햇살이 너무 커. 하늘만 봐도 눈이 부셔. 이런 날엔 놀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그늘을 만들어주려고 애쓰고 있으니 옆에 바짝 붙어 보라며 타일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욕심이 큰 햇살이 하늘을 다 차지하고 있다며 날씨가 너무 안 좋다고 툴툴대는 아이를 가만히 듣는다.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이었다. 행여 서투른 모습으로 타인과 틀어질까 숱한 날 얼마나 다그쳤던지. 남과 다른 나의 생각은 틀린 거라고, 스스로에게 남들처럼 생각하고 느끼길 강요했다. 끝없는 자기 검열 속에서 항상 나를 의심했고, 타인의 무례에도 되려 내가 머리를 숙였다.


 오직 누군가의 인정과 동의만 갈급했고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내 의견과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타인의 욕구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리고 기대했다. 내가 그들의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내게 나 자신은 중요치 않았다. 늘 방치했고 뒷전으로 미뤘다. 매일 밤 잠을 설칠 만큼 엄습하는 공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나를 꽁꽁 숨겼다.

 

 순간순간 느끼는 나의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은 남들과 달라도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다름은 다채롭고 신선한 색으로 세상을 빛나게 한다. 이 순간 의심 없이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아이 덕분에 평범한 일상이 새롭게 다가온 것처럼.


 나는 이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이해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개인 분석과 상담을 받고 마음 공부를 하면서. 많은 후회와 아픔을 견디며 나를 가뒀던 틀을 깨고 판을 엎었다. 변화는 두려웠지만 결국 나는 나를 위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혹독하게 감금했던 지난 날조차 인생의 일부로 반짝이는 나의 생임을 인정하면서.  


 “그래, 맞아. 오늘은 햇살이 너무 커서 놀기 힘든 날이야. 날씨 정말 안 좋다.”

아이 생각에 맞장구를 쳐주며 속상한 마음을 위로한다. 눈썹달 닮은 눈웃음을 띄우며 비 오는 날 보다 낫다는 아이를 따라 나도 웃는다. 그나저나 햇살이 너무 큰 덕분에 딸내미가 놀이터 대신 집으로 간다. 어쩌면 내가 설렌 가장 큰 이유 인지 모른다.

파인애플맛 환타 아니 산타!

 집에 도착해서 손을 씻는데 아이가 달뜬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엄마, 엄마~! 여기 산타가 있어, 산타!”

초여름에 산타라니 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걸까?

“엄마, 날씨도 안 좋은데 우리 산타나 한잔할까?”


 “딸, 그거…”

환타라는 단어를 꿀꺽 삼킨다. 산타, 환타. 그게 중요한가? 햇살이 너무 커서 날씨가 안 좋은 이 마당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아래 입술을 꽉 깨물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로 넣어 두는 건 엄마 인생을 살며 가장 어려운 숙제다. 가끔은 삼킨 웃음에 명치가 아플 정도.


 커다란 햇살 닮은 노란 빛깔 향기가 집안을 물들인다.

“잔을 쌔게 하면 짠!”

건배사를 외치며 잔을 비운다. 아이는 기억하게 될까? 더없이 아름다운 유월의 이야기를. 날씨가 안 좋은 날에도 삶은 곳곳에 산타를 숨겨두고 너를 기다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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