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영 Mar 26. 2022

가족적 거리두기

입양과 파양의 경험

공효진과 강하늘이 주연인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 속 이야기이다.

공효진은 엄마에게 어렸을 때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성인이 돼서야 엄마는 치매에 걸린 채 다시 나타났다.

그런 엄마를 보고 공효진이 한 대사가 있다.


"엄마가 나를 버렸을 때도 나는 '엄마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난 이해했어. 그런데 내가 버스터미널에서 봉구(공효진 아들)의 손을 놓친 적이 있거든.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뉴월인데도 이가 부딪힐 정도로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어."

"그 일을 겪고 난 후에 엄마가 용서가 안되더라."


그것은 내가 아이 낳고 느낀 경험과 똑같은 대사였다. 작가가 어떻게 그 심정을 알았지 싶었다.  


나는 6살 때 아버지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 엄마 나이 서른. 딸 셋을 둔 나이 서른의 여자가 감당해야 할 인생의 무게는 너무도 가혹했을 것이다.


슬픔도 잠시. 당장 생계부터 막막했다. 그런 와중 삼촌(아버지의 이복형제)이 찾아왔다. 내 또래 아들이 하나 있는 그 집에서는 우리집에서 딸 하나를 입양해 가길 원했다. (목적은 딸이 없어 적적하다는 이유였으나, 사실은 돈을 주지 않고 쓸 가정부가 필요해서였다)


어른들의 대화를 애써 외면하며 놀고 있던 나는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가장 만만한 존재 둘째인 내가 낙점되었다. 엄마의 눈길이 놀고 있는 세 아이에 중 나에게 꽂히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첫째는 첫아이를 안는 순간 느꼈던 잊지 못할 그 감동이 남아. 막내는 아직 엄마품이 필요한 어린 아이라 안쓰럽기 때문에. 그 중간에 끼어 이도 저도 아닌 나는 정 떼내기가 가장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집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에서 저 멀리 부산으로... 그리고 시작된 가혹한 시련들. 동갑내기 사촌 남자애는 나를 괴롭히고 때리며 못살게 굴었다. 친구들을 데려와서는 나를 가운데에 세워두고 둘러앉았다. 그리고 침을 뱉어 나를 맞추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침 뱉기' 내기도 하였다.  


작은 엄마라고 불리는 사람은 늘 청소와 설거지를 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부업 일거리를 가져왔다. 플라스틱 본체에 10색의 심을 꼽아 볼펜을 만드는 일을 시켰다. 자기 아들은 온갖 학원을 다 보내면서도 나에게는 공부를 가르치거나 학원을 보내주지 않고 일만 시켰다.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은 밤마다 늘 나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몸을 만지작 주물락 거리며 나를 인형삼아 바디필로우베개 삼아 잠을 잤다. 난 늘 숨이 막혔고 답답했지만 어린 나이에도 '나는 남의 집 살이를 하는 존재'. '눈칫밥 먹는 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화도 내지 못하고 묵묵히 견디기만 했다.


그렇게 1년을 살았던 것 같다. 나는 먹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먹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울기만 하니 다들 답답해 했고 나를 불편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선택적 함구증과 우울증에 걸린 것같다.


자신들의 편의로 또는 노리개로 데려온 것인데 말도 안 하고 그저 내내 울기만 하고 있으니 부담스럽고 짜증 날 노릇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필요 내지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파양을 결정했다.


작은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고 상경해 엄마한테 내던지듯 나를 맡겼다.


"하루 종일 울기만 하니 어디 키울 수가 있어야죠. 형님"


그 후로 작은 엄마를 본 기억은 없다. 그런데 그날 날 바라보며 '나도 곤란한데 이걸 어쩌나'라는 엄마의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한 번도 엄마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엄마의 삶이 너무 고됐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받아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엄마는 새벽에는 우유배달 낮에는 공장을 다니며 우리를 키워냈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나는 새벽에 거의 매일 나가 엄마와 우유배달을 했다.


나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남의 집 살이가 얼마나 고되고 서러운 줄 알기 때문에 가족과 살아야 한다고. 또는 무용한 아이가 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것이 새벽마다 일어나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삶이 고되 보여 나를 입양 보낸 엄마를 이해했고 미워해 본 적이 없어 용서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애를 낳아보니 아니었다. 내 속에서 나온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내 자식을 강아지 새끼마냥 이 집 저 집 돌리듯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콩이 한 조각뿐이 없다면 쪼개 먹을 지언정 헤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아이가 폐렴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며 두 뺨도 안 되는 팔에 링거를 꼽고 입원했었을 때 나는 대신 아프고 싶었고,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게 엄마였던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를 버렸던 엄마가 미워지기 시작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그간 세월은 다  잊고 "엄마 되기가 쉬운 줄 알아", "너도 낳아보니 자식 키우기 힘들지"라는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니요.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요'라는 말이 수천번 맴돌았지만 꺼내지 못했다.


엄마는 '작은 엄마가 널 키우겠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데려왔다.' '너를 키워 내느라 너무 고생이 많았다. '라는 등 당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왜곡하고 맞추며 내 기억에까지 주입하려고 하였다.


이상하게 나이들수록 더욱 개입과 간섭이 더 많아진 엄마에게 한번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엄마 나 다 기억나요. 작은 엄마가 못 키운다고 했을 때 곤란해하던 엄마의 표정까지도"라고


"그 어린 날이 다 기억난다고? " 라며 동그란 눈으로 놀라는 엄마를 보니 그 말을 한 것이 곧장 후회되었다.

 

엄마와 불행 배틀 하자는 것도 아니고 굳이 서로 상처로 점철된 과거를 꺼낼 필요는 없었는데

엄마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내가 기억하길 바라는 대로 믿게 놔두어도 됐었는데


그러나,

아직도 엄마는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나도 바라지도 않는다.

사과 한마디면 오래된 상처가 녹을 법도 한데...

엄마로서 체면과 권위가 실추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 한다. 아이를 입양 보낸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10살이나 더 어린 나이었으므로. 또 그 당시 그 시대적 사고와 배경도 있었을 것이며 아버지의 이복동생이었지만 친척이라는 이름의 신뢰가 있었겠지.라고


가족 간에도 거리를 두고 들여다 보기가 필요하다. 나를 떼어 낸 후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점으로 측은하게 바라보면 이해 못 할 가족은 없더라.



이전 01화 개인의 모든 갈등은 인간문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