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귤껍질 편지
많은 것들이 재정립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 사는 곳도 주변 사람들도 왠지 많이 바뀔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겠죠. 변화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이불에 돌돌 말려서 잠만 자다가, 겨우겨우 약속을 다녀왔어요. 막상 사람들을 만나니 에너지가 채워졌어요. 역시 혼자보다 사람들 속에서 행복감이 더 큰 것 같아요.
이번 귤껍질 편지에서는 지난 일과를 정리하기보다,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붙잡아서 써 볼게요.
ch1. 흰 눈이 와서,
시안의 겨울, 시안에 눈이 오면 정말 제일로 예뻐요. 포근히 쌓인 눈이 솜이불같이 사방을 덮어요. 시안 북스테이 안에 앉아 있으면 옛날 유럽 영화의 산장 같은 느낌도 들고, 시안 갤러리의 벽난로를 켜면 빨갛게 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공기가 점점 훈훈해지는 감각이 좋아요. 창 밖의 장면이 장면이 그림 같아서, 사진을 여러 장 찍게 돼요.
아침에 출근하며 설탕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다, 는 팀장님의 말에 종묘와 을지로 풍경을 한참 바라봤어요. 업무를 시작하고, 카톡이 자주 울려서 보니 가족 톡방에 엄마가 사진을 잔뜩 올려놨어요. 균형은 안 맞지만 어떤 장면을 담고 싶었는지는 알겠는, 쌓인 눈만큼 가득, 행복한 마음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어요. 매년 이맘때 엄마가 보내오는 시안의 겨울 풍경이에요.
ch2. 행복과 슬픔을 다루는 법
영미김밥, 비밀베이커리, 삭의 떡볶이와 튀김, 하겐다즈 초콜릿 아이스크림, 곶감, 만두,, 지쳤을 때 먹는 따뜻한 한 끼는 마음까지 채워주는 기분이에요. 호로록 슬퍼졌다가도 즐거운 대화, 따뜻한 물, 맛있는 음식, 개운한 운동으로 원상 복귀돼요.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들이 가득인데, 이럴수록 흘러가는 대로 둬야 한다는 걸 알아요. 그럼 또 어느새 맞는 길로 나아가고 있을 거란걸요. 서른 살을 맞아 피부과도 처음 가보고, 오래간만에 속눈썹펌도 짱짱하게 했어요.
뿐만인가요. 머리도 보글보글 펌을 하고, 매번 눈으로만 보던 네일샾도 예약했어요. 수집, 이라는 곳인데 일상의 귀여운 순간들을 모아서 손톱 위에 그려주는 것 같아요. 한 번에 우다다 하기보다, 계속 행복한 이벤트가 있도록 간격을 두고 하나씩 배치해 놨어요.
행복한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계속 슬픔에 슬픔이 더해지는 걸 끊어주기 위한 방법이 있나요?
ch3. 온기, 애정, 관심 같은 것들
사실 요즘은 조금 무서워요. 변화가 저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덮치고 있어요. 몰트봇이 종종 화두로 등장하고, 삼체 시리즈를 보기 시작하고, AI와 관련된 강의를 들으면서 세상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상상해요. 이런 변화를 손 꼭 붙잡고 나아갈 누군가가 필요해요. 우정이든 사랑이 든요.
심리학에서 애착에 대해 배울 때 오래된 실험 이야기를 들어요. 먹이를 주는 철사 원숭이 모형과 먹이를 주지 않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된 원숭이 모형 중 아기 원숭이는 후자에 안겨있어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다정한 온기, 따뜻한 관계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ch4. 다 알지 못해도, 오래 안 사람
<동창> 시사회를 다녀왔어요. 상처주다가도 같이 울어주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잘못을 덮어주기도 하는,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잘 녹였어요.
쌓인 시간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지나온 나의 역사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주는 편안함이 있죠. 또 누군가의 서사를 알면 기억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들이 동창회장 역할을 한 배역이 가장 탐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관계가 가볍고 쉬워지는 시대에,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역할, 여러 관계를 두루 아우르는 사람이 고맙다는 이야기에 공감했어요.
ch5. 볼이 발그레 해질 정도로 좋은
이슬아 작가님의 축사와 이훤 시인님의 축시, 강산애와 조현아 님의 축가까지 한 편의 공연을 보고 온 것 같아 행복했어요. 축시를 읊어주는 이훤 님의 목소리가 식장을 채우고, 원형 테이블 맞은편에서 분홍 셔츠를 입은 남성 분이 눈을 감고 듣고 계셨어요. 하나의 다정한 장면이 완성된 느낌. 이 모습으로 결혼식이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신랑님은 유난히 더 멋졌고, 신부님은 이날 처음 뵜는데요. 커다란 눈 안에 다정함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어요. 크고 맑은 눈에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같던 인스타그램 결혼 게시글을 봤을 때부터 기대하던 결혼식이었어요. 실제로는 더 좋았어요. 말랑말랑 기분 좋은 에너지들로 채워지는 기분. 단계단계별로 진행되는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어느새 볼이 발그레해져서, 한껏 기분 좋아진 스스로를 발견했어요.
ch6. 글과 그림, 색이 된 메시지들
바스키아 전시를 다녀왔어요. 맨발에 넥타이를 맨 사진이 ‘나는 뭐든 될 수 있으니, 규정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집을 나온 뒤 노숙을 했고 평생을 부랑자로 살 줄 알았다는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치열하고 위태로운 삶 속에서도 자신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놀라워요.
ch7. 처음 대출받아보는 사람
이번에 처음 대출을 받아보면서, 대출을 남의 돈보다는 내 자산의 일부로 운용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현금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전 세계의 경제가 불안정해 보이는 상황에서, 자산을 지키고 불리는 전략을 잘 세워야 해요.
일상에서는 별로 튀어나올 일이 없는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면모를 강제로 발휘하고 있어요 (ㅎㅎ) 처음 만나는 대출이라는 과제를 마주하고, 고민에 빠졌다가,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건가,, 철없는 뿌듯함도 들고 그러네요.
연초에 유독 일하기 싫어요. 어찌어찌 지각은 안 하고 잘 출근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마음이 싱숭생숭 쉽게 울적해지는 게, 집에 가서 배달음식 먹고 따뜻한 이불속으로 폭 들어가서, 알람 없이 푹 자고 싶어요.
이래놓고 시간이 생기면 새로운 약속을 잡고 영상과 책을 아우르는 콘텐츠들을 보고, 맛난 걸 먹고, 글을 쓰며 분주해질 가능성이 높지만요. 아무튼 요즘 약간 스스로를 임시보호하듯이 돌봐줘야 할 것 같은 상태예요. 곧 연휴니까, 다행이에요.
지하철에서 본 하늘
탭샵바 다녀왔어요
달고 맛있었던 모카 라테
눈 온 뒤 을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