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불명의 편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덴마크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이야. 그가 그랬어. 짐승은 절망을 모르고, 인간만이 절망을 안대. 근데 인간 중에서도 기독교인만이 절망을 알고, 절망을 느낄 때 비로소 내가 나 자신임을 안대. 내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고통스럽고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절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라고? 절망을 느낄 때라야 비로소 내가 인간임을 알 수 있다고? 이게 무슨 술주정 같은 소리냐고 비웃을 수 있는 구김 없이 밝은 사람이 바로 나였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삶의 스탭을 절망과 함께 차곡차곡 밟아온 키에르케고르의 아픈 춤은 마흔네 살이 되어서야 멈췄어. 그걸 죽음. 또는 영원으로의 회귀라고 하지. 안타까웠냐고? 전혀. 오히려 그가 너무 늦지 않게 해방되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지. 근데 있지, 내가 스무 살 때 수능 준비하다 윤리과목 문제집을 푸는데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에 관한 문항이 나왔거든. 보기(1~5 문항)는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의 철학 이론에 관해 역설한 내용이다. 다음 중 부적절한 것을 고르시오.라는 문제였는데, 객관식 문항 중 이런 문장이 하나 있더라.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한참 그 문장을 노려보는데 좀 화가 났어. 결국 그 문장 한 줄만 딱 남기고 문항 전체를 새까맣게 칠해 문제를 아예 지워버렸지. 어떻게 그게 오답이 될 수가 있어. 그걸 오답으로 하려면 문제 출제자가 키에르케고르에게 동의를 구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고독과 절망이 뭐가 달라. 고독이 깊어지면 절망이 되고, 절망이 침잠하면 고독이 될텐데. 키에르케고르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어. 혹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깊은 절망에 빠져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한 채 방에서 실존철학책만 읽다가 약간 돌아버렸는지 키에르케고르와 만나고 대화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40대 철학자에게 물어봐도 좋을 것 같았고 말이야.(물론 그런 사람은 없어.)
나는 매일 사막을 걸어. 이따금 모래폭풍이 내 육신을 전부 집어삼킬 듯 거세게 불면 선인장 뒤에 숨어서 오아시스를 상상해. 오아시스는 사막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지만, 기댈 수 있는 상상의 그늘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가 있거든. 하늘은 미동도 없이 고요하고,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늘의 침묵이 사막의 모래폭풍보다 더 끔찍하고 무섭다고 느끼고는 해.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내가 무섭다고 열 번을 넘게 말하면 너는 딱 한번 고개를 천천히 돌리고는 어떤 위로의 말이나 행동도 없이 그저 나를 지긋이 바라봐. 너의 시선이 내게 닿은 뒤 시간이 얼마간 더 지나 모래바람이 가라앉으면 나는 또 사막을 걸어. 어디까지가 사막이고, 내가 지금 어딜 향해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걸어. 매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모래폭풍을 두려워하고 매일 끝나지 않는 영원한 하늘을 견디며 그렇게 묵묵히 걸어. 매일매일 걷는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그래. 몇 번을 겪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거든. 그건 몇 번을 다짐해도 좀처럼 안 되는 것이기도 해. 내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너는 어쩌면 사막을 지키는 외로운 별 하나였을까. 가끔 내겐 어떤 일들이 사고처럼 일어나는데, 다 지나고 보면 해프닝 정도였음을 알게 돼. 겪어봤기에 사고가 났을때 난 결코 당황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아. 그냥 조금 실망할 뿐이야. 누군가 날더러 그건 외로운거래. 그렇대도, 나는 내 외로움이 너 때문인지 아니면 너 때문에 내 외로움을 겨우 견뎠던 것인지 알아내지 못한 채 매일 사막을 걷고 있어. 가진 것 없는 내가 너를 가질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행운이 비껴갔기에 내가 너를 가질 수 있었던 걸까. 오늘 낮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갔대. 덥다. 노랫말처럼 서울하늘엔 별 하나 없구나. 그래도 키에르케고르의 마음속엔 기댈 수 있는 별 하나쯤은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