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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Jul 25. 2024

북한의 바이올리니스트

늦게라도, 증인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서울 '경'에 나아갈 '진'.
나는 당신이 서울에 한 번 올 줄 알았다.
지휘자 정명훈의 주선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협연 뒤 앵콜로 '늴리리야'를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문경진
은하수 관현악단 단원 공개처형의 진실 / 출처:송지영TV


영상을 위에 놓은 이유가 있다.

동영상을 먼저 보아야 한다. (처형의 진실)


음악을 소개하는 매거진에 모든 이야기를

적진 않더라도, 그의 누명만큼은 이렇게나마

벗겨주고 싶었다. 북한 언론이 주장한 정보를

그대로 전달한 전 세계 언론에서조차 불명예로

도배되었던 그 이름에, 세월 흐른 언젠가라도

내가, 증인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는 저 영상의 내용이 '진실'임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아냐고? 고백하건대, 내가 문경진에게

러시아에서 '성경을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고 몇 달은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내가 그를 그리 만든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영의 세계와 복음, 그 후 세계를 분명 알기에,

궁극적으로는 그가 영원히 천국에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몰랐다면, 만일 내가 전하지 않았더라면

성경을 읽다 예수님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며 최고의 자리를 맘껏

누리고 있을 것이며, 특히 그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기에 괴로이 울고 다녔다.


너무 미안했다.

화염방사기에 의해 사라지는 자식을 봐야 했던

그의 어머니가 혼절했다는 이야기에 괴로우며

믿기지 않아 넋 나간 채 마음으로 방황했었다.


문경진은 우리 학교에 다녔다.

이 이야기를 오늘 자세하게 다 적을 수 없으나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를 믿고

성경이 진리임을 알아버린 이상, 그의 성정으로

혼자 믿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안다.


'그래도 혼자 몰래 읽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남의 영혼까지 위하여 복음을 전했을까.

그가 만난 예수님은 어떠하였기에, 그로 인해서

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성경을 갖고 다녔을까.


나라면 그런 체제에서 과연

성경을 읽고 전할 수 있을까.


그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내 생에 감히 순교자를 보다니

아직도 한편 믿기지 않는다.


음악가로서의 문경진에 대해 언급하자면

아버지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3살에 바이올린을

배웠다.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악기는 스트라디바리 - 김정일이 하사했던 것이며

러시아에 오기 전 물론 북한에서만 배웠다.


그를 보면서 계속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는,

외국에서 조금만 더 살아도 훨씬 발전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닫힌 나라다. 음악에도 제한이

있고, 무엇보다 문화적으로도 정해진 틀 안에서만

평생을 살아야 한다. 여자애들은 몰래 드라마라도

보며 다른 세상을 간접 경험하지만, 문경진의 경우

평생 그런 것도 본 적 없는 '순수 북한 결정체'와

같은 인물이었다. 내가 Take 6와 재즈 연주회에,

영국 지인과 함께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살아생전 재즈를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감동적이라고 했다.


북한이 그에게 명 악기를 주었을지 몰라도, 음악에

있어서는 크게 불리했다. 가진 재능이 뛰어나므로

만일 그가 자유국가에 머물며 보통의 사람들처럼

보통의 세계에서 다양한 음악과 레슨을 접했다면,

빠르게 성장해 더 훌륭한 연주자로 남았을 것이다.

재즈라는 음악조차 목숨을 내놓고 들어야 하다니.

나는 그저, 그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북한에 방문한 우리 학교 교수 Ivanov가 문경진을

보고 "내가 데려가 키우겠다"고 하여 오게 됐었다.

이것은 또 다른 북한 친구에게 들었던 내용인데, 더

들은 얘기로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라고 표현했다.


내가 만난 문경진은 굉장히 겸손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겸손한지, 소리에 대해서 칭찬할 때마다

"악기가 좋아서 그래요"라고 하며 쑥스러워했다.

친해지고 난 뒤에도 한 번도, 교만한 적은 없었다.


얌폴스키 콩쿨에서는 최상은 아니라 3위를 했는데

1등 한 러시아 애를 얼마나 칭찬하던지, 승부욕 있는

람이었지만 같은 전공자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나는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에 다녔다.

주변에 악기 전공자가 많았고, 그들끼리는 무언의

경쟁과 경계심 그리고 질투와 우월감이 존재한다.

문경진 같은 매너와 마인드를 지닌 이는 드물었다.


나는 작곡가이다.

좋은 소리를 지닌 연주에 감동받고 응원하게 된다.

친구 보러 간 학교 연주회에서 Bach의 '샤콘느'를

연주하는 문경진의 소리를 듣고 깊이 감명받았다.


나중의 콩쿨에서보다 그날 더 잘했는데 영상이나

녹음이 없어 안타깝다. 게다가 바흐의 샤콘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곡만 남겨야 한다면

반드시 선택할 곡이었다. 그 곡을 그렇게 잘했다.


알고 보니 러시아 파가니니 콩쿨에서 2등을 했단다.

전부 우리 학교에서 한 건데(차이콥스키 콩쿨처럼)

그때만 해도 관심 없고 잘 몰라 들어보진 못했으나

영재 중 영재, 귀가 아주 높고 까다롭던 내 베프가

"소리에 꽤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어"라고 말했다.


반주자가 솔직히 문경진에 비해 못할 때가 많아

방해되는 것이 많아 보였는데, 불평도 안 하길래

내가 물어보자 그가 이렇게 표현한 적은 있다.


"혼자 하는 게 제일 편해요. 반주 없이...

 바이올린 솔로 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는 바다를 좋아했다.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바다를 실제로 보는 것이 자기 꿈이라고 했다.

바다에 가 본 적 이 글의 주인공은 사실 그다.


F 대장인 나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 감수성에 내가 박장대소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유난히 순수했고, 놀랍도록 솔직했다.


당시 영재 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이 다니면서

금호에서 후원받던 혁주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둘 다 Violinist이다 보니 서로 관심이 많더라.


나는 문경진의 친구이자 권혁주의 친구였지만

혹 누가 난처해지기라도 할까 봐, 혁주가 "문경진

콩쿨 같이 보러 가자" 하면 "그래" 하며 가 놓고

나중에 문경진이 "혁주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하면 "그렇죠.."라는 대답만 할 수 있었다.


둘 다 왜 이 세상에 없는지 참 이상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 간첩이 많이 있다.

내려온 간첩들과 고정간첩으로 뒤덮여 있다 보니

나의 안위가 걱정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다소

프라이벗 한 내용을 공개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더구나 일명 '국가 보안법'에 대해 잘 모르겠고

그땐 더욱 그러했다. 만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냥 유학생일 뿐이고 우리는 정치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음악 친구'였을 뿐이란 말이다.


나에게는 그런 북한 친구가 여럿 있었고

문경진은 떠났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남들이 가지지 않은 에피소드라도 풀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 사람이 많이 없어지던 시기가 있었어.
스탈린 시절이었지. 소련일 때 말이야.

- 아.. 소비에트 시절을 지나셨죠 참..

- 하루 자고 나면 앞 집 사람이 사라졌고
 다음 날, 옆집 사람이 온 데 간 데 없어졌어.

- 왜요??

- 누가 신고해서 잡혀갔거든.

- 신고요?

- 정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언급하거나 말실수라도 하면, 서로 고발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사라졌었어.

나의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소비에트 연방

공산주의 체제를 넘어오신 분들이었다.

작곡 교수님 댁에는 그 시대 최고의 상이던

'레닌상' 우승패가 한켠에 놓여 있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한 이유로

치욕스러운 누명이 씌워졌음에도, 환한 얼굴로

그가 바라본 것은, 기관총, 화염 방사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었음을...

그의 고귀한 순교가 천국에서 헛되지 않음을...


내가 만난 많은 음악가들 중 가장 로맨틱하고

가장 속 깊고 배려심 많고 겸손하고 성품 좋고

능숙한 피아노 실력, 심지어 청아한 목소리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노래까지도 잘 부르던

북한의 바이올리니스트 문경진.


그의 인품과 숭고한 믿음을 깊이 존경한다.



- 오빠, 성함 뜻이 뭐예요?

- 제 이름 뜻이요?

- 아, 제가 사람들 만날 때 이름 뜻을 꼭
 물어보거든요. 한자는 하나도 모르는데,
 뜻은 물어봐요. 사실 이름 기억하려고...

- 제 이름은 서울 '경'에 나아갈 '진'이에요.

- 서울 경이요??

- 네, '서울 경'이에요. 서울로 나아가라..는..

- 아니, 잠깐.. 농담이시죠..?

- 진짜예요.

- 이름에 서울 경을 써도 돼요?!

- 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지어줬어요.


나는 당신이 서울에 한 번 올 줄 알았다.

이름처럼, 서울로 한 번은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평생 바다에 가 보지 못한 채 눈물바다를 남기고

서울보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당신을 추모한다.

혁주와 함께 볼 때 골동품 같은 저화질로 내가 남겨두었던 문경진의 연주 일부 / 무단복제 및 유포를 금합니다.


문경진 구원에 관한 꿈 글 읽기 [ 꿈 일기 - 갓난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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