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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Aug 25. 2024

천사의 눈물

2017년 초봄, 파리

꿈 이야기에 앞서, 나는 빠리에 대한 환상을
품은 적도 없고, 베르사유 궁보다 경복궁에
가슴 벅차오르는 한국인이다. (베르사유보다
경복궁을 늦게 가본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

부모님의 희생 덕에, 10대에 동생과 유럽여행
일정 중 빠리를 넣은 건 순전히, 동생이 미술을
전공 중인데다, 모스크바에서도 가까워서였다.

나에겐 웬만한 르네상스 그림은 다 비슷한 데다
조각상도 '그놈이 그놈..' 같았으나 동생을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펼쳐진 동생의 일기장에
[더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누나 때문에 다 못
보고 돌아왔다]라는 글귀를 본 기억도 난다.ㅎㅎ

몇 나라를 돌면서 나라별 특성을 파악하던 내게
프랑스는 음악, 미술, 춤, 패션 무엇 하나가 확
뛰어나다기보다는 '통합예술'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나 통합예술이고 뭐고, 빠리는 내게 절대로
다시 안 갈 '최악의 도시'였다. 영어로 물어도
프랑스어로 답하는 거만함은 기본이고, 떠나기
전날 밤 루브르에서 동생과 숙소로 돌아오는데
돈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해 보려 꺼낸 내 지갑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지갑이, 소매치기 일행보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내 동생 손에 들어오자, 다시 뺏기 위해 동생에게
손을 대려 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한적한 밤길,
지갑을 구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생수병과 미술책.

커다란 몸집 흑인 둘. 동생이 위험해지느니 차라리
지갑을 주는 게 나았지만, 링 위에서 싸움 전 서로
경계하는 적처럼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아까 봤는데 내 지갑엔 동전 7유로와 신용카드가
전부였다. 솔직히 지갑이 비쌌지, 현금은 없었다.

그들이 다시 내 동생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칠 때
내가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동생이 표현하기를,

"그때 빠리 동네가 다 울렸다. 흔들흔들했다."

할 수 있는 게 비명 지르기뿐이었으니 마구 지르자
흑인이 당황하며 막으려 할수록 더 크게 질러댔고
피자헛 건물 안에서 직원이 나와 우리 쪽을 살폈다.

보란 듯이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피자헛 사람이
들어가지 않자, 버텨보던 흑인들이 뒤로 물러섰다.

민박집으로 가는 동안 다시 쫓아올 확률이 높아
피자헛에 들어가 제일 싼 메뉴를 시키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40분 넘게 죽치고 앉아있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나오며 서로 망을 봤다.

"없어? 잘 봐바. 정말 갔나?"
"간 것 같아, 없는 것 같아."

동생과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말했다.

"나 아직도 떨려. 너 다치는 줄 알고 하.."
"나도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

그때 알았다. 동생이 하도 용감하길래 몰랐는데
미성년자가 커다란 흑인들 앞에 얼마나 놀랐을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날 영국으로 떠나기 위해
유로스타 탑승역에 도착해 메트로에서 나오는데,
내가 메트로 출구 문 사이에 꼼짝없이 갇혔다.

당시 파리 메트로 일부는 지금과 조금 달랐다.
(명칭을 몰라 설명은 못 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빠리에는 표도둑이 흔했다. 표를 찍고 들어갈 때
바싹 뒤따라 남의 표로 들어가는 '표도둑' 말이다.

나는 캐리어와 함께 갇혔고, 새로 표를 넣어야만
다시 문이 열리는데 어제 피자헛에서 돈을 다 써
이제 유로가 없었다. 소매치기 아니었으면 7유로
일부러라도 남겼을 텐데. 환전하면 되지 않냐고?
유로스타 탑승시간이 코앞이었다.

뒤를 돌자 한 흑인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다.
바로 저놈 때문에 내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태어나 누구를 그렇게 노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만 중간에 갇힌 상태, 시간이 흐르는 상황에서
아직 방법을 못 찾았는데, 한 프랑스인 여성분이
대신 자신의 표를 찍어주셔서 다시 문이 열렸다.

"Merci!"

하자마자 동생과 미친 듯이 뛰었지만 <방금 전>
탑승이 마감됐으니 표를 새로 사야 한다고 했다.
런던에서 마중 나올 분과 시간약속도 돼 있었다.

창구에 사정 이야기를 하자, 1등석 표인 것도 혹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무상으로
다음열차표를 우리에게 발권해 주었다.

그것이 빠리의 마지막날이었다.

'다시는 빠리에 안 온다. 아, 너무 싫어.'

그래서 안 가다가... 10여 년이 흐른 뒤 엄마에게
유럽을 보여줄 기회가 왔다. 엄마는 내 동생처럼
미술에 일가견이 있는데, 내가 싫어한단 이유로
빠리를 보여주지 않는 건 양심에 찔릴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갔다. 믿거나 말거나, 혼자라면 이제
안 가도 그만인 도시였지만 엄마만을 위해 갔다.

이번엔 하필 빠리에서 오지게 아팠다. 심한 몸살로
루브르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응급차라도 부르고픈
상태였다. 어디에 가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10년에 한 번 먹을까 한 진통제를 몇 알 먹었다.

그래도 두 번째 빠리는 옛날과 많이 달랐다.
영어로 물을 때 영어로 답하는 사람이 많았고,
묻지 않은 것을 친절히 알려준 경우도 많았다.
파리에 살던 옛 룸메이트가 과일차를 손수 끓여
나와주기도 했고, 베르사유에 살던 옛 룸메와도
잠시 만났다. 그러나 옛날의 '소매치기 사건'을
잊을 리 만무했기에 엄마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여기는 치안이 너무 안 좋아. 소매치기 많으니까
 항상 조심하고 다녀야 돼. 모스크바랑 달라."

도난방지용 끈, 호신용 스프레이는 물론, 지갑도
휴대폰도 조심, 내 눈은 쉴 틈 없이 주변을 경계,
흡사 적진에 들어온 스파이 같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고 다니니 엄마도 편했을 리 없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모두 경계하며
이번 여행에서는 소매치기당하지 않는 성공적인
보안(?)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쳐 택시를 타고 돌아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드디어 꿈 이야기. 배경은 실제와 같이 빠리였다.


내 무릎보다는 조금 위만큼의 키, 유치원생 즈음

돼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자꾸만 우리 엄마의

물건을 훔치려 하고 있었다. 능숙하게도 아니고,

다 보이는데 어설프게 가져가려 시도 중이었다.

더 황당한 건, 엄마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져가려

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아이가 훔치지 못하도록

계속 경계하며 다그치는 느낌으로 막아내었다.

결국 그 아이는 소매치기에 실패했다.


이제 내가 그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잃은 게 없는데 왜 그 아이를 따라가는지 몰랐다.


그 아이는 빠르게 이동했다. 나도 뒤를 따랐다.

멀리 갔다. 버스도 타고 걷기도 하고, 먼 동네까지

가는 동안 쉬지도 않아서 나도 쉴 새 없이 걸었다.

돌아보지 않아 내가 쫓아가는 줄 모르는 상태였고

우리 둘의 거리는 계속 일정한 간격이 유지되었다.

한참을 가다 드디어 멈추더니, 자기 집에 들어갔다.


집도 방도 아닌 것 같은 처음 보는 구조였는데

그런 곳을 처음 보았다. 아마도 그런 곳이 정말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디에든 있을 것이었다..


그 동네는 빠리와 너무 달랐다. 다른 세계와 같았다.

집이라기보다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많은 사람들이

칸칸이 붙어 모여 사는 그런 방들만 있는 곳이었다.

태어나 (꿈에서조차) 처음 보는, '빈민가'였다.


그 방 중 하나가 그 아이의 집이었는데, 그 집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막내 같았고,

이 아이의 가족도 그곳의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너무 가난하고, 배고프고,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목격해,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내가 돈을 주는 게 나았을 텐데...'


그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물어보았다.

프랑스인이지만 꿈에서는 영으로 소통하다 보니

말을 알아듣는다. 그런데 물어온 내용이 이러했다.


당신도 장례식에 왔냐는 것이었다.

위로해 주러 왔냐고...


알고 보니 그 아이의 큰 형, 그 집 장남이 죽어서

부모님과 많은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있었다.


안에서는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다.

큰 형 장례식 날이었다. 우리엄마의 물건을 하나

훔치려고 했던 그 배고픈 꼬마아이에게는 말이다.

집에서 부모님이 그 아이를 케어해주고 말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아이는, 생존하고 싶던 것이다.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선 자리에서 앞을 보자,

멀찍이 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 내가 비쳐 보였다.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서 거울을 다시 보았더니

내 왼쪽 옆에 작은 존재가 나란히 선 것이 보였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그 작은 존재도,

모두 거울을 통하여 보았다. 키가 그 꼬마아이와

비슷하거나 더 작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고

절대로 소매치기를 할 존재도 아닌,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익숙했다. 내 옆에 있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 댁

아궁이 앞에서 우리엄마와 내 동생을 죽이려고 한

마귀를 예수의 이름으로 내쫓을 때, 우측 윗편에서

나와 한 목소리로 외쳐준 존재 - 동일인물이었다.

[ 꿈 일기 - 4화 친가에 살던 귀신 1 참조 ]


이제 거울로 나 자신이 아닌 그 천사를 보았다.

울고 있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게 울고 있었다.


아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었다.

존재가 느끼는 슬픔이 내게 동일하게 느껴지자

그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다 깨어났다.


숱한 영적 꿈을 꾸는 동안, 한 번도 실제로 운 적은

없었다. 나의 꿈은 무서우면 무서웠지, 슬픈 경우는

드물고, 꿈은 꿈으로 끝나기 때문에, 아무리 리얼한

꿈이라 하더라도 눈을 뜨면 일단 상황이 분리된다.


그런데 이 꿈에서는, 깨어났을 때 내 얼굴에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시려 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꿈의 통곡이 현실로 이어져 울음을 멈추지 못한 나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막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결코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우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끝, 손끝, 발끝, 몸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뼛속까지 울어야 할 통곡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깊이 울다 겨우 멈추고 거울을 보자

전에도, 후에도 보지 못한 '흰자 없는 눈'을 보았다.

(너무 오열한 나머지 눈 흰자 전체에 핏발이 섰다)


그때 깨달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너는 하나라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들을 피하려 애쓰다 돌아가버리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가난하고 슬프고 괴로우며
그들을 보는 나의 마음은 찢어지도록 아프다.

나는 그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본다.

그들은 네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도와야 할 대상이다.



쓰레기 같았던 나의 여행 태도에 부끄러웠다.

(빠리에서만 그랬..어도 제가 잘못했습니다)


유독 빠리에서만큼은 '이럴 수 밖에 없다'던

나의 생각이 그 날 그 꿈으로 무너져버렸다.


엄마와 나는 곧 그곳을 떠나왔지만

빠리에서 본 그 남자아이, 장례식에서 들었던 질문,

그리고 내 옆에서 울던 천사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The Lord is gracious and full of compassion, slow to anger and great in mercy. Ps. 145:8
자기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죄를 짓되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행복하니라. Prov. 14:21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요 Matt. 5:7
긍휼을 베풀지 않은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느니라. Jas. 2:13

오늘로 [예지몽-꿈 일기] 연재를 마칩니다.

앞으로 꿈이 더 모이게 되면 엮어 보겠습니다.

그동안 꿈 일기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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