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언제까지 세야 하는 거지?
이 산보다 높고, 저 산보다 낮고
"이게 미쳤나?"
그때 알았다. 싸움도 영화처럼 안된다는 걸.
난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손을 짚다가 깨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에 박혔다. 아프다.
다시 일어나 또 덤벼들었다. 침대에 한 발을 올렸다.
'쩍'
난 왼쪽 뺨을 세게 얻어맞았다.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후~우, "
그가 숨을 깊게 내뱉더니 쓰러진 내게 다가온다.
종대라는 산이 점점 더 높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동기들과 96학번 형들이 보이는데, 종대산에 심어진 작은 나무들처럼 보인다.
의식의 잠수
"어 휴. 이걸 살려? 말아? 야!"
날 보고 뭐라 하는데,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다.
"너넨 뭐 하냐? 들어와서 바닥에 이 유리들부터 좀 치워라!"
방 문쪽을 보며 뭐라 말하는데, 금붕어처럼 '뻐끔뻐끔'거리는 것 같다. 마치 내가 잠수해서 산에 사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주위의 소리가 '웅웅웅' 거린다.
동기들이 들어와 바닥의 유리들을 집기 시작한다.
아, 이제야 함께 싸우려 하는 건가? 그래도 유리를 집는 건 위험한데. 그래도 저런 동기들 보니 이제야 좀 힘이 난다.
나도 그에 질세라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변이 살짝 흐릿하게 보인다.
종대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고, 96학번은 그에게 술을 따라주려고 컵과 소주를 공손히 내민다.
종대의 시선을 따돌리고 있다. 동기들이 그 틈을 타 유리로 그를 찌르려는 거다.
'우~웅, 웅, 웅, 웅, '
내가 저지른 일이다. 안된다. 절대 동기들 손에 피 묻히면 안 된다.
저 앞에 제법 큰 유리 조각이 유독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난 자세를 고쳐 잡고 그걸 짚으러 기어갔다. 바닥에 깨진 유리 위를 짚으면서 가는데, 그때 알았다.
아프지 않다. 유리가 박힌 손도, 종대에게 맞은 얼굴도 아프지 않다.
많은 훈련 덕에 맷집이 강해져 있는 건가?
그렇지, 형의 샌드백으로 살던 시간이 얼마인데,
그게 다 맷집 훈련이었다.
동기 하나가 내 앞에 섰다.
"야! 도중아, 저리 가. 다치자나."
동기의 말이 또렷하게 들린다.
"도 중 아 가 자"
그래, 가자. 종대 새끼 혼내자.
왜 이제 온 거니?
이제라도 와줘서 고맙다.
다시 종대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있는 그의 뒤로 큰 에베레스트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형이다. 종대가 작은 동산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난 갑자기 종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다시 수면 위로
그 순간 물 밖을 나온 것처럼 다시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갔다.
"야! 도중! 정신 차려. 일어나. 다친다고."
동기는 나한테 소리를 지르더니, 내가 집으려던 유리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동기들은 바닥을 정리하고 있었다.
"인마, 뭐 하노? 유리 위에서 차력쇼 하는 것도 아니고. 쯧쯧. 저 손바닥 어쨌을까? 도중아, 고마해라."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96학번 형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하고 있다.
"유리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말고. 화장실 다녀올 테니, 대충 치우고 다들 들어가서 자게 해라. 이게 뭐꼬? 술 다 깼네."
"네" "네"
형들은 끝까지 종대 새끼를 깍듯이 대하고 있다.
이대로 끝나는 분위기다.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마지막 기회다. 결정타를 날려야 한다.
그때, 생각 하나가 스쳤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실수(친형 앞에서 감정이 터진다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로 감정이 터진 날이 있었다. 그날, 나의 일격에 형이 쓰러져 소리도 못 냈던 적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난 올 F가 목표인 돌머리이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
난 100m 달리기 출발자세처럼
박차고 종대 형을 향해 달렸다.
두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몸을 스프링처럼 구부렸다.
머리를 재빨리 들어 올렸다.
목표점은 친형도 나에게 정복당한 거기다.
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기를...
거시기를 받아 버렸다.
친형도 못 버틴 곳이다. 에베레스트 산 같던 그도 이곳을 맞았을 때 무너졌던 곳이다. 그런데 종대형은 그에 비하면 작은 동산에 불과했다.
"야,,,, 이,,, 씨,, 너, 어. 아... 씨~~"
그의 오른 다리가 무너졌다.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그의 왼손은 거기를 지키러 갔다.
오른손은 무너진 균형을 잡으러 침대 바닥을 대고 있다.
난 그대로 그의 왼쪽 얼굴을 풀파워로 강타했다.
버티고 있는 왼발을 양손으로 휘감았다.
있는 힘을 다해 당겨 넘어뜨렸다.
'쿵'
침대 이불에 떨어져 있던 빈 소주병을 봤다.
난 오른손으로 병을 거꾸로 잡고,
유리가 박힌 왼손으로 그의 얼굴을 뭉개며 소리를 질렀다.
병적 트라우마
"안 먹는다고 했잖아!"
오른손을 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찍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먹는다고 했잖아! 이 씨발놈아!"
난 그대로 풀스윙을 했다.
'퍽'
그때 동기 하나가 몸을 날려 날 밀쳐냈다.
난 중심을 잃고 벽에 부딪혔다.
들고 있던 소주병이 벽에 부딪혔다.
'퍽'
유리파편이 침대에 떨어져 내렸다.
종대형은 곧장 일어나 내 위에 올라탔다.
"아, 이 개새끼. 그만하라니까. 왜 그러니? "
동기는 도와주지 못할망정, 나를 방해했다.
설마 종대 편이었던 거야? 서럽고 분했다.
그러나 120kg에 깔린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맞아 죽을지 모른다. 생각할 틈조차 없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나를 두들겨 패려고 한다. 진심이 느껴진다.
방어기제의 발동
난 친형 덕분에 방어를 어떻게 하는지 안다.
두 팔을 올리고 맞을 준비를 했다.
'퍽'
한대, 두대, 세대....
그래, 역시 난 맞는 게 더 편하다.
그냥 숫자를 세면서 반항 안 하고 맞고만 있으면,
상대가 알아서 끝낸다.
그래, 이게 나한테 쉬운 거였다.
네 대, 다섯 대, 여섯 대...
어느 순간부터 터득했다.
아빠가 술 먹고 온 날.
감정을 죽이고 '퍽퍽'한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워도,
양을 세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된다는 걸...
삼천 오백구십구 마리, 삼천 육백 마리...
일곱 마리... 여.? 멈췄다. 뭐지?
모두가 그 거구를 막고 있었다.
"형! 선배! 이제 그만해요."
외로움, 카타르시스
눈물이 났다.
친형에게 맞을 땐 그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 날 보호해 주려고 다들 종대형을 막고 있다.
동기들이 뒤늦게 합류한 게 얄밉지만,
기분이 꽤 좋았다.
이대로라면,
웃으면서 삼천 육백대도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하하하하하하..."
천장을 보고 웃는데, 일제히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와, 이 새끼 미친 거 아냐? 알았다. 이거 놔라. 화장실 좀 가게."
종대형도 이 많은 상대를 하기에는 버거운지 멈추고 나갔다. 나도 웃음을 멈췄다.
이 짙은 밤, 이 방에 처음으로 몇 초의 고요함이 흘렀다.
그제야, 동기들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중아~ 괜찮아? 야, 손이 이게 뭐야?"
"진짜 너 가지가지한다. 이 정도까지 갈 줄 몰랐네. 미안."
"너는 그래도 같이 할 줄 알았는데. 좀 같이 문 좀 차주지. 쳐 웃기나 하고. 가만 생각하니 어이없네. 뭐? 손도 안 들었다고? 아아, 아프다고! 살살해"
"엄살은..."
다들 감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격한 상황은 종료되었다.
잠시 후, 종대 형이 들어오더니 한 명씩 화장실로 오라고 했다.
진심은 티 난다
내 차례가 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종대형이
갑자기 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주먹을 날렸다.
순간 눈을 감았다.
'픽'
어라, 이건 무슨 소리지?
눈을 뜨고 보니, 그의 오른 주먹이 벽에 붙어있다.
그때 감지했다.
종대형은 겁을 주고 있다.
진심을 다한 소리는 이렇지 않다.
난 안다. 진심을 다한 벽치기 소리는
라면 물이 끓는 소리도, 부엌문도,
방 문 너머까지도 뚫고 날아온다.
많이 맞다 보면
상대 주먹소리, 호흡소리만 들어도
진심 펀치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나는 이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친형에게 배운 감지력 덕분이다.
종대형의 지금 벽치기 소리는 날 때리려고 했던 게 아니다.
이 일이 쪽팔린 거다.
하하하. 특히, 급소의 자신감이 없던 것이 들통난 거다. 가만 보니, 내 머리에 그 크기가 저장되어 있다. 하하하. 맞다. 창피할만했다. 그렇다. 나보다 작으면 무조건 쪽팔려야 하는 거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협박성 말을 하고 나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문 앞에 섰다. 방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노의 위험
왜 그리 정신줄을 놨던 걸까?
모두에게 미안했다. 큰일 날뻔했다.
내가 깬 유리 파편이 96학번 선배 형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제법 깊게 박혔다.
화장실에서 본 종대형 눈 밑에 유리가 스친 상처와 유리 박힌 손으로 그의 얼굴을 세게 잡고 뭉갰을 때 난 상처인지, 곰보처럼 몇 군데 상처가 나있었다.
분노라는 감정을 밖으로 분출시켰던 첫날이었다.
날이 서서히 밝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술 한 모금 안 마셨는데,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취했다.
그 감정은 묘한 기쁨이었다.
난 '씨_익' 웃고 있었다.
유리창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유리가 나무틀에 박혀있다.
유리를 뽑아 치우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있는 여러 감정들도 이렇게 뽑아졌으면 좋겠다.
갑자기 모든 유리조각들에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세 번째 파편의 영상이 끝났다.
그 많던 구슬 파편들의 재생표시가 다 사라졌다.
바닥에 놓인 푸른 기억의 파편들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난 허리를 구부리고, 444방 사건의 파편을 집어 들었다.
안내방송
3개의 파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3+1. 바닥에서 한 개를 더 가져가면 됩니다. +1 파편의 영상은 이 게임의 엔딩화면입니다. 그때를 위해 잘 보관하세요.
유난히도 반짝이는 조각 한 개를 더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모든 파편의 푸른빛이 다 꺼지고 칠흑 같은 암흑이 되었다.
문과 문 사이
그때는 몰랐다.
이성을 잃으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그 이후, 종대형은 기숙사에서 술자리를 안 가졌다.
난 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휴학을 하고 있다가 3년 후 자퇴를 했다.
결과가 괜찮다고 과정이 모두 합당한 것은 아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이걸 그때 느꼈어야 하는데, 2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또 비슷한 상황이 닥쳐도
난 자신 없다.
다만, 그러지 않도록
매 순간,
내 앞에 놓인 문들을 바라볼 뿐이다.
매 순간마다, 많은 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매 순간마다, 잘 열고 닫아야 한다.
여는 문의 형태, 방향을 한시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내게 어떤 순간, 어떤 일들이 닥칠지 모른다.
그때 또다시
소중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힐지 모른다.
이 두려움이 숨처럼 항상 내 곁에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이 두려움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
내 능력으로 떨쳐낼 수 없을지 모른다.
숨을 쉬며 살아가듯, 이 두려움을 잘 감지하고
내 사람들을 지키는 방향으로 잘 활용시켜야 한다.
도중아, 난 널 알아. 넌 변하지 않았어.
넌 지금 어떤 문을 열고 닫으려 하니?
그 순간 문이 다시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철컹'
난 빛을 따라 나아갔다. 건너뛰고 온 3(삶) 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