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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Nov 24. 2020

"한 때는 예쁘고 날씬했잖아."라는 말

일상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지독스런 폭력에 대하여


“어, 아닌데? 이 집 딸은 되게 날씬하고 예뻤잖아!”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수유에 편한 옷을 입고 화장기 없이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친정 엄마 사무실에 들러 아기를 보여드리던 날,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게 엄마가 “우리 딸이야!” 하고 나를 소개했을 때 돌아온 대답.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얘기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 지나갔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산후 다이어트를 시작해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다...는 결론이 났다면 참 좋았겠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이를 24시간 오롯이 품에 안고 있던 나에게 몸매 관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와 온종일 신나게 놀아 주기 위해선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했고, 저녁 늦게 돌아온 남편과 마주 앉아 하루의 회포를 푸는 데 맛있는 음식이 빠질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는 홀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혹은 글을 쓰며 나의 마음을 다독이는 게 필요했다. 밥을 굶거나 애써 몸을 혹사하며 예전의 체중을, 외모를 돌리려고 애를 쓰고 싶은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나는 내 모습이 싫지 않았다. 날렵한 턱선은 사라졌지만, 한층 둥글어진 덕분에 인상도 어딘가 순하고 포근해진 느낌이었고, 매일같이 얼굴을 두텁게 덮고 있던 방송용 메이크업에서 벗어나 로션조차 바르지 않은 말간 얼굴은 세상 가볍고 편안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가깝다는 이유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오랜만에 봤다는 이유로, 한결같이 나의 외모의 변화를 지적하며 걱정을 가장한 평가와 비난을 일삼았다. 비교 대상이 스무 살 무렵의 나인 건 그나마 양반이고, 출산 후 초단기 다이어트에 성공한 연예인 누구라든지, 애를 셋 낳고도 처녀 적 몸매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어느 집 며느리까지 비교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던 내 모습이 초라하고 부끄러워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덤으로 따라오는 ‘게으르고 자기 관리에 실패한 아줌마’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 자존감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한 때 예뻤으나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하다’는 평가는 꽤나 폭력적이면서도 서글프다. 대부분은 ‘네가 아까워서’ 혹은 ‘그러다 건강을 해칠까 봐’ 같은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지만, 건강을 염려해야 할 만큼 고도비만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걱정스러울 만큼 얼굴이 망가지지도 않았다. 사실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겨우 겉으로 보이는 얼마 간의 변화에 대해, 내가 충분히 기분이 상할 수 있을 법한 말을 무심코 내뱉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존재를 오롯이 이해하고 삶을 깊이 있게 나누고픈 마음이었다면, 치열하게 지내온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아내로, 엄마로 여물어가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를 놓지 않기 위해 틈틈이 짜내고 펼쳐가는 창작의 세계를 바라보았겠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나간 세월 속 어떤 모습과의 간극, 혹은 내가 지향하지도 않는 어떤 이상적인 모습에 빗대어 지금 이 순간에 실재하는 나를 깎아내리는 한 마디는, 일상의 가면을 쓰고 흔하게 나타나는 지독스러운 폭력이다. 반짝이던 내면의 빛마저 시들하게 꺾어버리는, 무시하며 흘려듣고 싶지만 어디엔가 깊숙이 박혀서 울컥 서글프게 만드는.   



바닥을 치던 자존감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건, 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 처음으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다. 아이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며 나 또한 새로운 사회와 관계 속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과연 엄마를 떨어져서 생활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던 아이는 놀랍게도 새로운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며 환하게 피어났다. “봄이를 보면, 정말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자란 아이라는 게 온몸에서 느껴져요.” 아이 손을 잡고 하원 하는 길에 같은 반 엄마들이 진심을 담아 건넨 한 마디에, 아이에게 오롯이 쏟아부은 지난 5년의 모든 순간이 봄날 벚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튤 스커트를 입은 날 “봄이 엄마 공주님 같아요!”라고 말해주는 여섯 살 꼬마의 한 마디에, “우리 딸이 나보고 봄이 엄마처럼 예쁘게 머리를 좀 기르라더라.”며 쌜쭉한 표정으로 웃어주던 아이 친구 엄마의 이야기에, 잔뜩 찌그러졌던 자존감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전해지는 다정한 칭찬과 위로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내 마음을 갉아먹던 생채기가 서서히 아물었다. 다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예뻐하기 시작했다. 스무 살 무렵에 싱싱하고 산뜻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면, 서른 중반을 넘어선 지금은 그때보다 한층 깊고 너른 사람이 되었다고 믿으면서. 여전히 일상적으로 툭툭 날아오는 폭력적인 말들은 아프고 서글프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요?”라고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일곱 살 꼬마들 사이에선 그래도 봄이 엄마가 공주 같고 예쁘다고 먹힌다니깐요!”라며 너스레를 떨 수 있을 정도의 너그러움을 가지려 한다. 겨우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대한 평가에 나의 자아가, 반짝이는 자존감이 쉬이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더욱 깊이 탐색하고 진지하게 사유하며 돌보아주려고 한다. 비록 지난날들의 아름다움은 빛을 잃었다 해도 지금 나에게는 그때 갖지 못했던 또 다른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고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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