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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Jan 20. 2021

아마추어, 순수하고 순결한 기쁨

<줄리 & 줄리아>, 그리고 나의 오늘


창밖에는 귓불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분다는데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다. 길게 뻗은 따사로운 햇살이 집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평온한 아침, 고요하고 행복하다. 오랜 세월을 어디선가 묵묵히 견뎌 왔을 빈티지 원목 가구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따스함을 더해준다. 몇 년째 아침이면 습관적으로 틀어 두는 클래식 FM이 잔잔하게 흐른다. 음악이 끝난 자리에서 이어지는 진행자의 다정한 목소리조차 음악처럼 들리는 마법의 시간, 모두가 분주하게 집을 나서고 난 뒤의 텅 빈 공간,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노란색 포근한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창가에 나란히 선 만세 선인장 위에도, 듬성듬성 구멍이 난 몬스테라 잎 사이사이에도 이른 봄빛을 머금은 햇살이 잔잔히 스며든다. 며칠째 라디오에서는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영화여서 진작에 본 것 같지만, 진행자가 나긋나긋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사랑스러운 여인들을 꼭 다시 봐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 아침시간에 하릴없이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지나치게 ‘백수’ 같은 느낌이 들어 자제해 왔는데, 오늘은 참지 못하고 이 영화를 틀었다. 이른 아침부터.


햇살에 기대 니트 블랭킷을 덮고 영화를 보는 '영화같은' 아침


개봉 무렵에는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 어쩌면 크게 와 닿지 않았나 보다. 다시 만난 그녀들은 시작부터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복되는 일상, 무료한 나날에 지쳐갈 때 찾게 된 운명 같은 취미 생활. ‘먹고사는’ 문제와 크게 관련 없는 ‘그저 재미난 일’이 주는 활력과 기쁨, 행복을 알기에 누구보다 몰입하고 공감하며 바라본 그녀들의 하루하루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다정한 남편들 역시, ‘나의’ 이보보와 겹쳐져 보였고. 언제 들어도 설레는 그 이름, 내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파리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마저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던, 두 시간의 짧고도 긴 여행.  


 

‘아마추어의 기쁨’이었다. 생계를 목적으로, 혹은 대단한 전문성을 지녔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쁘고 설레고 행복해서 하는 어떤 행위들. 순수하게 사랑해서 하는 일들만이 줄 수 있는 순결한 기쁨.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속에는 사랑(love)을 뜻하는 아모르(amor), 사랑하는 사람(lover)을 뜻하는 아마토르(amator)라는 말들이 녹아 있다.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실로 사랑으로 점철된 단어다.  



영화 속 그녀들은 분명 아마추어였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때론 비웃고 무시해도,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고 덮게 만드는 ‘내가 사랑하는’ 일을 찾아 몰입하던 순간들. ‘인생의 즐거움’을 찾게 해 준 그 무언가-그녀들의 경우, 프랑스 요리- 덕분에 무료하고 지난한 일상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삶에 활기가, 생명력이 넘쳤다. 그렇게 쌓인 순간순간들은 그녀들이 꿈꾸지 않았던 꿈으로 그녀들의 삶을 이끌었다. 프로 같은 아마추어, 프로 이상의 아마추어로.




어쩌면 지나칠 만큼 안온하게 흐르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른 아침 시작한 영화는 한낮의 햇살과 함께 눈부시게 끝이 났고, 다시 조용하고 평온한 텅 빈 공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여유로운 순간들을 받아 든다. 많지 않아도 꾸준하게 나의 글을 끄덕끄덕 공감하며 읽어주는 사람들, 조그마한 그림 한 점에 자신의 공간이, 혹은 마음이 밝아졌다며 감동과 감사를 전해오는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아마추어’로서의 나의 일상을 근사하고 가치 있게 바라보고 응원해주는 나의 단짝, 든든한 나의 남편. 그들로 인해 그대들로 인해 나의 사랑이, 나의 오늘이, 그리고 나의 내일이 반짝인다. 이 빛나는 순간들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곳이 어디든 기쁨과 행복으로 반짝일 테니.  


"You're butter to my bread, Breath to my heart."


오늘 저녁에는 기쁜 마음으로, 영화 속 그녀들이 만들었던 ‘뵈프 부르기뇽’을 만들어야겠다. 겉을 바삭하게 구운 소고기에 반듯하게 썬 채소들과 향신료, 붉은 와인을 넣고 오래오래 뭉근하게 끓여내, 바쁘고 지친 일상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신나게 뛰놀며 한 뼘쯤은 자라났을 아이에게, 따스하고 든든한 저녁상을 내어 주어야지. 나의 고요하고 안온한 일상을 가득 채웠던 기쁨과 행복을 가득 담아서.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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