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나에게는 내용이 사라져 버린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주어만 있고, 목적어, 서술어가 없다. 주어만 있는 이야기, 그러니까 나, 너, 우리, 그들만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몸이 없는 사람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흔적은 간헐적으로 나에게 온다. 시간 혹은 망각이라는 터널을 지난 어떤 사건 혹은 상황이 내게 다시 상기되는 날 나는 강한 허기를 느낀다.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서늘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비행기가 지나간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어느 노인을 떠올린다. 이것은 분명히 이야기인데 줄거리를 기억하는 이가 없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이야기에서 줄거리가 있었고 등장인물이 있었지만 그 기억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이유로 내용이 사라져버린 이야기는 헐렁한 헝겊 아래에 가려진 형체 없는 에너지 덩어리와 비슷하다.-아래에 있는 덩어리보다는 실루엣에 더 가까운.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놀이를 시작하려 한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종종 기억의 파편들을 줍는다. 그것은 기억이 앙금과 맑은 물로 분리되는 날에만 내 눈에 보인다. 앙금은 기억의 원본을 각기 다른 셀로판지에 투과시킨 것처럼 이미 다른 색의 세상으로 번져 있다. 나는 원본의 색채를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물들어 버린 색의 기억들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운이 좋은 날이면 셀로판지가 투명에 가까워지고 나는 기억의 원본을 찾아 그것에서 가장 가까운 형상을 캔버스에 그릴 수 있다. 캔버스로 옮겨진 기억들은 대부분 왜곡되거나 굴절되어 처음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이토록 지난한 작업에서 내가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역사이고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찾으려 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나타날 수 없는 나만의 오롯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가장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아픔을 참는 것이 언제나 옳은 일은 아니 듯 아파서 피하는 것 또한 해결책일 수 없다. 아픔이 두려웠던 날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환부에 붙어있는 거즈를 떼어낼 때 섬세함과 단호함이 필요하듯. 내 작업을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누구를 설득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날그날을 그리며 살아간다. 오래된 구슬들을 실에 꿰어 내는 것은 어릴적 내가 지금의 내게 던져 둔 숙제이다.
나는 20년 가량 이 사라져 버린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나는 사라진 이야기를 토대로 하는 픽션을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나의 아프고도 찬란했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구슬을 끼우기 시작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방향은 다름아닌 나로부터 흘러나왔고 나를 향해 돌아가는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리는 실처럼 보인다. 커다란 원의 일부분을 잘라서 보면 그건 그냥 하나의 직선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 직선이 모이면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의 거대한 원이 된다. 그 원을 그리는 난 그림의 안에서 혹은 밖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