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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부하는 아빠 Feb 02. 2022

저는 거품 가득한 맥주가 좋습니다.

조심스럽게 삽니다. 

"여기요!, 피처 3000, 거품 빼고 주세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는 거품 없는 맥주만 마셨습니다. 돈 없는 학생들에게는 맥주 거품은 사치였죠. 피처 잔에 거품 없이 황금색 맥주만을 가득 주는 호프집이 좋았습니다. 맥주에 거품이 있으면 업소의 상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맥주에 거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영국 가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 간 영국의 펍에서 맥주를 처음 시켰습니다. 종업원은 잔을 45도 기울여서 맥주를 따르다가, 맥주가 잔의 2/3 정도 찼을 때 잔을 수직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맥주 위에 알맞은 거품이 생깁니다. 처음 볼 때는 신기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거품 없이 주는 맥주만 먹었는데, 이곳에서는 맥주 위에 항상 거품이 있습니다. 영국의 술 먹는 습관으로 생각하여 주는 대로 먹었습니다. 근데, 꽤 맛있습니다.


기네스와 같은 흑맥주 위에 있는 거품은 더 예술입니다. 기네스를 시키면 폭신폭신한 솜사탕이 맥주 위에 떠 있습니다. 그 달콤한 솜사탕을 통해서 씁쓸한 맥주가 목으로 들어옵니다. 맥주를 마시다 거품이 없어지면 잔을 세우고 기다립니다. 맥주 안에서 풍선 같은 거품들이 방울방울 올라옵니다. 하얀색 풍선들이 맥주 위에 있는 거품들과 합쳐집니다. 다시 거품이 생기면 폭신한 거품과 함께 맥주를 또 마십니다. 맥주를 다 마신 후에도 잔 밑에 남아 있는 솜사탕을 털어서 마십니다. 이제는 거품 없는 맥주는 잘 안 마십니다. 집에서도 풍성한 맥주 거품을 만들기 위하여 거품 생성기까지 샀습니다. 맥주를 마실 때는 적당한 거품은 필수입니다.


맥주에 거품이 필요한 이유가 다 있더군요. 맥주의 거품은 맥주와 산소를 만나는 것을 막아서 맥주의 맛을 오래 유지시켜 준다고 합니다. 천천히 맥주를 마셔야 할 곳이면, 맥주의 맛이 오래 지속되어야 하겠죠. 그런 곳에서는 맥주에 거품이 필요하겠지만, 한국은 원샷을 위해서 맥주를 시킵니다. 맥주의 맛을 오래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제 삶에도 거품이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하여도 외부의 자극에 제 감정은 쉽게 변하였습니다. 좋고 싫음을 바로 표현하였고, 외부의 자극에도 쉽게 발끈하였습니다. 제 삶에 낀 거품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제 감정을 보호해줍니다. 저에게 있는 이 거품은 '조심스러움'입니다. '혹시나 말을 잘못하지는 않을까?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까?'를 종종 생각합니다. 제 감정을 바로 보여주었다가 쉽게 마음이 상한 적이 많았기에, 이제는 말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합니다. 


맥주의 거품은 단백질을 통해서 생긴다고 합니다. 제 인생의 거품은 제가 살아온 경험에서 나옵니다. 맥주의 거품이 외부의 산소로부터 맥주를 보호하여 주듯이, 제 경험이 만들어낸 거품은 제 감정을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보호하여 줍니다. 젊었을 때는 거품이 없어도 세상을 바로 대할 수 있었죠. 그때의 저는 신선한 맥주였습니다. 맛보다는 빠름과 시원함이 중요했을 때였죠. 이제는 거품 없이 세상을 바로 접할 자신이 없습니다. 거품 뒤에 조심스럽게 제 감정을 묻어둡니다. 잔이 기울어질 때마다 나오는 맥주처럼, 제 마음도 상대방에게 기울어질 때 감정을 흘려보냅니다. 제 감정을 천천히 보여주고 싶습니다.   


맥주를 빨리 마시면 거품이 금방 없어집니다. 제 감정이 많이 흘러 나가면 '조심스러움'도 금방 없어집니다. 거품을 만들 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품이 만들어져야 제 감정을 흘려보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겠죠. 이제는 '조심스러움'이라는 거품 없이는 바로 세상을 만나는 것이 어려우니까요. 거품 있는 맥주가 그 맛을 오래 유지하듯이 조심스러움이라는 거품이 저를 오래 유지시켜줍니다.


맥주의 거품은 한 곳으로 모입니다. 제 거품도 몸의 한 곳으로만 모입니다. 두툼한 뱃살을 보면서 맘도 든든해집니다. 충분한 경험이 쌓이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거품 가득한 맥주 한잔이 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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