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느긋해도 괜찮지 않을까?

6월 둘째주, 반딧불이처럼 깜빡한 은채

by 최영훈

요즘은 아빠가 데리러 갑니다. 엄마의 육아휴직은 끝났고, 돌봐 줄 사람은 아빠 밖에 없으니까요. 아빠가 사무실에 나가는 화요일엔 외할머니가 함께 해주시고요. 아이를 픽업할 때 학교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걸 자제해달라는 학교 부탁이 있어서 정문에서 돌봄 선생님께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챙겨서 내보내 주시죠. 은채는 운동장 저 너머에 있는 아빠를 발견하면 어김없이 뛰어 옵니다. 그러면 전 또 어김없이 “뛰지 마, 뛰지 마.” 하고 외치죠.


6월임에도 선선한 날씨가 며칠 이어졌지만 은채는 늘 덥다고 툴툴거립니다. 음료수를 얻어 마시려는 사전 포석이라고나 할까요? 은채는 요즘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장애인 복지관 카페에서 파는 청포도 에이드에 빠졌습니다. 이 카페는 경증 장애를 가진 청년들의 자활을 위한 바리스타 교육과, 그 실습 현장으로 운영하는 곳입니다. 마침 아내의 후배가 이곳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실습에 도움도 주고 시원한 것도 마시자고 들렀던 것이 은채의 워너비 음료를 탄생시켰죠.


그러나 이날은 그냥 편의점에서 1+1 탄산음료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둘이 달달한 과일 맛 탄산음료를 마시며 집으로 걸어왔죠. 집에 도착했는데 문자가 하나 와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온 선생님의 숙제 및 공지사항 문자 전달이었죠. 보니 수학 익힘 숙제가 있었습니다.

“은채야. 너 수익힘 숙제 있던데 손 씻고 간식 먹고 해.”

“그거 학교 가서 하면 돼.”

“응? 숙제를 왜 학교 가서 해. 집에서 해.”

“아니 그냥 학교 가서 하면 돼.”

“숙제는 집에서 해야지.”

잠시 후 은채가 아빠가 앉아 있는 서재로 왔습니다.

“나 사실 학교에서 책 안 가져 왔어.”

그럼 그렇지.


종종 남자 아이들은 엄마가 숙제하라고 하면 학교 가서 하면 된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내가 들어가 있는 엄마들 단톡방엔 아들 엄마들의 하소연이 줄을 잇는다고 하더군요. 학교에서 책을 안 가져오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죠. 은채는 성격 상 미리미리 해놔야 마음이 편한 녀석입니다. 수학 학습지 숙제도 며칠 분을 미리 해놓거나 최소한 하루에 정한 양은 꼭 해야 마음이 편하죠. 또 학교에서 부모님과 함께 언제까지 해오라는 숙제는 할 때까지 엄마 아빠에게 재촉 해서 제출 하루 이틀 전에는 꼭 해야만 합니다. 그런 은채가 학교 가서 숙제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는 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었죠.


결국 전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은채와 학교로 갔습니다.

은채 말이 네 시가 되면 교실 문이 잠길 수도 있다고 해서 말이죠. 벌써 시계는 세시 45분이었죠. 걸으면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은채는 마음이 급했는지 유엔 로터리의 보행자 신호등 두 개를 차분히 건넌 후 박물관 담장부터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부터 학교 초입까지는 차가 안 다니는 인도가 쭉 이어지니까요. 좀 뛰게 놔뒀습니다. 은채에게 숙제의 중요함과 자기 물건의 소중함을 한번 더 알게 해주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다른 마음으로는 이러다 강박증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됐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책을 안 챙겨서 발생한 일이니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 조금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은채는 부지런히 학교 건물로 들어가서 책을 챙겨 왔습니다. 오후에 있었던 일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 우리는 반딧불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은채가 행여나 이번 일로 엄마 눈치를 보게 되지는 않을지, 반딧불을 마음 편히 보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 됐기 때문이죠.


구청에서 지정한 집결 장소에 가니 사람들이 제법 왔습니다.

아홉시에 해설사 선생님께서 이기대 반딧불이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 이것이 어떻게 이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산에 서식하게 됐는지 알려주셨죠. 이윽고 선생님을 따라 어두운 산길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산악 오토바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조명과 소음 때문에 반딧불이가 없어진 건 아닌지 걱정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정 된 장소에는 반딧불이가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실망했는지 하나 둘 자리를 떴습니다. 그 어두운 산에 두 세 가족이 남아 있었죠. 그때였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가로수에 얹혀진 LED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들어오듯이 반딧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은채는 그야말로 뭔가에 홀린 듯 반딧불을 봤습니다. 아내도 저도 모처럼 설레었습니다. 숲은 조용했고, 초승달은 어느 때보다 환했으며 공기는 나무가 뿜어내는 좋은 기운으로 가득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열시가 다 될 때까지 반딧불을 보고 왔습니다.


아내는 사소한 것도 미리 준비하고 예약을 철저히 잘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물건 잃어버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죠. 물론 저 또한 그런 편이지만 어딜 예약해서 가는 습관은 별로 없습니다. 엄마가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은채도 미리미리 준비하고 어딜 여행을 가도 충동적이고 계획 없는 코스로 가는 건 생각지도 않습니다. 늘 다음에 어디를 가는지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어디를 가든 숙소는 예약되어 있고, 다음 날 조식을 어디서 먹고, 어디를 가서 관광을 하고, 점심과 저녁은 어디서 먹을지 다 준비되어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죠. 그런 은채에게 숙제할 책을 학교에 두고 온다는 건 정말 큰 사건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뛰어갔던 것이고요.


반딧불을 보면서 좋아하던 은채가 곤하게 잠든 후 은채가 아직 아이라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학생이기 전에 아직 아이이고, 아이이기에 조금은 마음이 여유롭고 느긋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든 잘해야 하고, 뭐든 착착 준비해야 하고, 뭐든 계획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에는 아직 이른 게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아직은 철딱서니 없는, 조금은 천방지축 하는 그런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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