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나의 부모는 다르다.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40

by 최영훈

우리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

수학 학습지 선생님이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오셨다. 다섯 시쯤, 구립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기로 한 계획은 뒤로 미뤄졌다. 다섯 시에 오신 선생님과의 수업은 다섯 시 사십 분쯤 끝났다. 엄마랑 통화해 보라고 했다. 딸이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엄마 퇴근할 때쯤 되면 늘 시키는 일이다. 저녁은 뭐 먹을지, 어디쯤 오셨는지, 아빠랑 책을 반납하러 갈터이니 집에 아무도 없어도 놀라지 마시라... 그러자 아내가 태워주겠다고 한 모양이다. 집 근처에 도착했다고 말이다. 딸은 책을 챙겨 내려갔다.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 뭐 드실래요?", "따님은 아직 책 고르시나? 당신은?", "전, 차에서 기다리고 있죠.", 그 후 저녁 메뉴 이야기를 했다. 실습생 교육도 끝나서 한 잔 하고 싶다는 아내는 맥주에 어울릴만한 음식을 나열했다. 최근 먹어 본 가지 만두를 말하기에 냉큼 좋다고 했다. 그러다 이야기는 은채의 비행기 티켓 이야기로 이어졌다. 8월에 유류할증료가 올라간다고 해서 지금 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딸은 12월에 미국에 간다. 이모와 친할머니가 사는 텍사스로, 그것도 혼자서. 다음 달에는 영어 학원도 본격적으로 다닌다. 내가 한마디 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애를 글로벌 인재로 키우고 있네.", 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게... 당신은 서른다섯이 넘어서 비행기를 처음 탔는데... 얘는 세 살 때 미국에 가고...."

"우리도 어릴 때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지금하고 좀 달랐겠지?",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 우리도 가고 싶다는 학원 보내주고, 해외도 보내주고 했으면 지금하고 달랐겠지. 다 지 복이지 뭐. 다른 환경의 부모를 만났으니 다르게 크겠지."... 아내가 담담하게, 조금은 씁쓸하게 말했다.

만약은 없지만... 만약에...

장인은 직업군인이셨다. 하사관으로 오를 수 있는 곳까진 오르셨다. 그러다 퇴직 전 목돈을 만들고 싶으셔서 정년퇴직 전에 퇴직하셨고, 그 돈으로 사업을 하시다가.... 사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사업의 결과가 다 그렇듯.... 그때, 아내와 처제, 처남은 교육이 중요한 시기였다. 다들 학원도 안 가고 대학들은 어떻게 잘 갔다. 자세한 내용은 너무 기니 생략한다.


나? 난 더 기니 짧게 얘기하면.... 감독을 알고 지낸 지 십 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내 어린 시절의 가난에 대해, 그 궁핍함과 궁색함과 빈한함을 말한 적이 있다. 나름 힘들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감독도 내 이야기를 듣고 기가 차 했다.


그렇다. 아내가 말했듯 우리 같은 조건을 가진 부모를 우리가 만났더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지 모른다. 달라져서, 서로를 안 만났거나 못 만났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딸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가 보지 않은 길은 상상도 허락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다. 다만, 그저, 약간 아쉬울 뿐이다.


헌법에 빠진 딸을 보며

요즘 딸은 헌법에 빠져 있다. 5학년 1학기 사회 시간에 헌법을 배웠는데, 헌법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는지 갑자기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헌법의 조항을 옮겨 적으며 공부하고 고시생처럼 외우기도 한다. 내 자식이지만... 흠....


아내나 나나 부모들이 책하고 거리가 멀었다. 집에 책이라곤 백과사전, 전집류 정도였다. 개인의 취향, 독서의 여정을 읽어낼 수 있는 책이라곤 단 한 권도 없었다. 최소한 우리 집은 그랬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연애시절부터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애가 커서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빠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덕분에 요즘엔 책을 사고 읽는데 조금 뻔뻔해졌다. 아이가 공부할 때 난 책을 읽고,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딸도 슬며시 뭔가 꺼내 읽는다. 아니면 자기 방에서 딴 짓을 하거나.. 뭐 그것도 제 나름의 휴식이니.. 놔둔다.


대출 목록

엄마와 도서관에 향하기 전, 딸은 방학을 맞아 학교 도서관의 대출 기일이 늘어났으니 그냥 반납만 할까, 하고 내게 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도서관 카드를 챙겨가라고 했다. 앞서 말했듯, 엄마를 도서관 주차장에 기다리게 해 놓고서 몇 권의 책을 골라 빌려 왔다. 역시 헌법, 또는 법에 관한 책이다.

대충 제목을 보니 제법 수준이 높아 보인다. 주문한 저녁이 오기 전에 맥주를 사러 딸과 함께 편의점에 가면서 지나가듯 말해줬다.

"딸, 책이 좀 어려운 것도 있겠더라. 머릿말을 읽어보고 어렵겠다 싶으면 다 읽을 필요 없어. 몇 장 들춰보고 잘 못 골랐다 싶으면 그냥 반납하면 돼."

"그래?"

"응. 뭐, 저번에 알라딘에서 산 책 있잖아. 그거 다 안 읽었지?"

"응"

"그게 네 수준에 맞는, 헌법에 관한 책이니까. 그거 다 읽고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으로 넘어가 봐. 그래도 어려우면... 뭐, 도서관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빌린 책은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면 대출의 문턱은 높아진다. 막 꺼내서 닥치는 대로 읽고, 포기하고... 뭐 그러다 보면 자신의 수준과 취향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책의 구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되고... 뭐 그런 거 아닐까? 여하간 책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고, 도서관을 주민센터처럼 만만하게 보는 것이 책과 동행하는 인생의 첫걸음 아닐까 싶다....


대출 목록은 변한다.

어차피 헌법에 관한 호기심은 가을이면 끝나지 않을까? 2학기 사회부터는 역사를 배우니 말이다. 그때는 또 역사 코너를 기웃되겠지. 일단은 집에 있는 역사책부터 뒤적거릴 테고... 그러면서 자기만의 책세상을 만들어가겠지.... 온갖 이름과 골목과 미로가 뒤섞인,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올법한 그 복잡한 도서관 같은 책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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