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내가 날 기쁘게 해야 한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19

by 최영훈

기술 도핑 논란을 불렀던 수영복

한 십여 년 전,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전신 수영복을 입는 남성 회원들이 있었다. 올림픽이나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이런 형태의 수영복을 입은 남자 선수들이 세계 신기록을 세울 때였다. 펠프스의 접영 세계 기록도 이 전신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그래서 후에, 당시에 세워진 신기록을 얘기할 때 전신 수영복을 입고 세운 기록이라고 꼭 말한다. 기술도핑이라는 지적이 많아지면서 이 수영복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동호인들이 입는 건 선수들이 입는 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흡사했다. 색은 주로 검은색 같은 무채색 계통이었다. 이런 전신 수영복을 입는 사람이 많진 않았다. 그때만 해도 이런 고가의 선수용 수영복을 파는 곳도 별로 없었는 데다가, 다들 평범한 수영복을 입고 오는데 혼자만 수영 선수처럼 그런 전신 수영복을 입는 것이 신경이 쓰여서였기 때문이다. 고급반의 1, 2번 주자 정도? 나도 그 시기 두 명 정도 봤었다.


반전신의 복귀

다시 수영장에 가니 이런 수영복은 없었다. 남자 회원들은 평범한 사각이나 5부 수영복을 입었고 여자들은 화려한 색의 수영복을 입었다. 특히 여자 수영복은 내가 수영을 안 하는 사이에 많은 브랜드들이 등장해서 디자인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패턴이나 색상은 물론이고 등판의 밴드처리까지, 최대한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특이한 수영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과거의 전신 수영복과 비슷한 형태의 여성 수영복으로 관련 사이트에서는 반전신 수영복이라고 통칭하는 것이었다. 이런 수영복들은 대체로 기존의 원피스 경영 수영복에 남자의 5부 수영복을 이어 붙인 형태가 기본 디자인이다. 여기에 가슴을 덮는 것도 모자라 거의 반 터틀넥 티셔츠처럼 거의 목 부근까지 지퍼로 올릴 수 있는 하이넥 수영복도 있다.


이런 수영복이 색상이라도 좀 밝은 색이면 봐줄 만 한데 대체로 검은색이나 남색을 메인 색상으로 하고 약간의 무늬만 넣거나, 하체만 다른 색으로 하는 것이 기본 색상 구성이다. 허기야 노출이 신경 쓰이고 남에 시선이 불편한 사람이 원색의 반전신 수영복을 입을 리 없겠지.


나중에 찾아보니 이런 수영복은 수영 기초 세트에 묶여 팔리거나 할머니들이 주로 하시는 아쿠아로빅 용도로 많이 팔리고 있었다. 그러나 앞선 글에도 말했듯이 기초반은 주로 무난한 색상을 선호하니 수모와 수경까지 검은색 같은 무채색인 경우가 많다. 결국 이런 세트를 입고 수영장에 등장하면, 뭐랄까... 닌자 같아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세트에 포함된 수경의 렌즈가 눈이 안 보이는 미러 형태는 아니어서 갱단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 아닐까?


당신도 안다. 당신이 닌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수영장과 수영에 조금 익숙해지면 수영복을 바꾼다. 물론 아주 보수적인 성향의 여성이라면 중급반이나 고급반이 돼도 여전히 그런 수영복을 찾아 입는다. 그러나 대체로 화려한 색상의 경영 수영복으로 갈아탄다. 화려한 색상의 반전신 수영복으로 갈아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화려한 것으로 갈아타려고 해도 몇 개 없다. 내가 들어가는 수영복 사이트에서도 무채색이 전혀 안 쓰인 화려한 색상의 반전신 수영복은 채 열 개가 안 된다. 그나마도 센티라는 브랜드의 것이 대부분이다.


수영복을 살 때,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라.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무도 당신을 보지 않는다. 다들 물속에서 정신없다. 당신이 수영장에 있는 한 시간가량의 시간 중 전신을 보여주는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분이 안 된다. 스타트 연습을 하는 고급반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아니 그럼 다들 왜 그렇게 화려한 수영복을 입는 거야?", 몰라서 묻나? 그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단순한가? 사실이다. 물속에 들어가서 숨이 찰 정도로 수영을 하고 나와, 샤워하고 가는 게 다인 스포츠가 수영이다. 그러니 입은 거라도 좀 화려해야 하지 않겠나? 그냥 기분 전환이 되는 거다. 내 개성도 보여주고 말이다.


큰맘 먹고 수영장에 등록하고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기분 우중충하게 닌자 같은 수영복을 스스로에게 입힐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다른 운동이 장비 빨이라면 수영은 수영복 빨이다. 그 수영복이 주는 기분 빨이란 말이다. 일단 그 빨로 시작하는 것이다. 물속에서 멋지게 수영을 해서 그 만족감으로 수영을 계속하는 건 훨씬 뒤의 일이다. 그때까진 화려한 수영복 자랑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그런 패션쇼에 간다고 생각하고 수영장에 가벼운 마음으로 매일 출근해야 한다. 몸매가 안 좋다고? 얼굴이 못 생겼다고?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차피 수경으로 반쯤은 가리고 물속에 몸도 얼굴도 다 묻고 있는데 무슨...


일단, 내가 나를 위로할 것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기분 좋게 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해주겠는가? 가나 스윔이라는 유명한 수영복 사이트에 들어가서 SOTD라는 메뉴를 클릭해 봐라. 미리 말하는데 깜짝 놀랄 것이다. 자기가 산 화려한 수영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찍거나 가족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할 테니 말이다.


참고로 말하면 남자는 거의 없다. 또 참고로 말하자면 검은색이나 무채색 수영복을 입은 사람도 거의 없다. 또, 또 참고로 말하면 엄청난 글래머도, 엄청난 몸짱도 없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한 몸매의 평범한 동호인이다. 그런데 그걸 왜 올릴까? 자신의 신체 사이즈와 자신이 고른 수영복의 사이즈를 친절하게 소개하고 감촉이 어떻고 색감이 어떤지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말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그러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아무리 멋진 수영복을 입고 가도 여전히 수영장에선 숨이 차고 내 몸이 내 맘 같지 않겠지만, 뭐 어떤가, 그것 또한 나 아니겠는가? 언젠간 잘할 날 오겠지.


사족, 혹은 약간 공포 후기

사족이라면 사족인데, 요즘 약간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살이 전혀 빠지지 않아서다. 수영을 다시 하기 전의 몸무게는 70킬로그램 정도였다. 좀 많이 퍼마시면 74킬로그램까지 올라갔는데, 그러면 당연히 몸이 무겁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에 운동의 강도를 올려서 살을 뺐다. 달리기를 하든가 해서 말이다. 그런데 수영을 다시 하자마자 몇 개월 만에 64킬로그램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몸이 물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몸무게가 회복되더니 현재는 69킬로그램까지 회복됐다. 그리고 유지하고 있다.

이 유지가 약간 무섭다. 일단 운동 강도는 더 강해졌는데 몸무게가 그대로라는 것이 첫 번째로 무서운 점이다. 게다가 요즘 아침에 먹는 탄수화물과 당의 양이 엄청난데 그것이 살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무섭고. 단적인 예를 들자면 예전에 베이글을 먹을 땐 크림치즈나 잼을 바르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요 며칠 베이글에 땅콩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누텔라를 발라 먹었다. 맛이 어떤지 궁금해서이기도 했고 운동 몇 시간 전에 에너지를 저장해 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운동을 너무해서 살이 빠질까 걱정도 되어서였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몸무게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만약, 수영을 그만두고 수영하던 때만큼, 그런 식으로 먹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금방 4,5킬로그램 찌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요 며칠, 이 예측의 결과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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