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의 바이올린

9월 마지막주- 은채의 연주를 처음 듣다.

by 최영훈

입학해서 바이올린을 시작했지만 한 번도 들어 본적은 없습니다. 엄마는 은채 생일에 바이올린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내년 2월이나 되어야 은채 손에 바이올린이 들어오겠죠. 은채는 손꼽아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은채가 집에 와서 바이올린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응? 무슨 소리야?”

“응 돌봄 선생님이 주셨어. 돌봄 선생님 딸이 쓰던 건데 나 쓰라고 주셨어. 바이올린 선생님 보여줬는데 줄만 갈고, 활만 갈면 더 쓸 수 있데.”

“그래? 근데 바이올린 왜 안 가져왔어?”

“아, 그거 그냥 돌봄 교실에 두고 쓸려고.”

금요일, 문화센터의 주산 교실을 끝내고 근처 마트에서 엄마와 만났습니다. 엄마에게도 자랑을 했죠. 그러나 전 뭔가 미심쩍었습니다.

“그게 네 것이라는 거야. 아니면 돌봄 교실에 두고 바이올린 배우는 애들이 함께 쓰라고 주신 거야?”

“내 꺼야. 선생님이 나 주셨어.”


결국 아내가 돌봄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은채 말이 맞았죠. 은채한테 바이올린이 생긴 것입니다. 아내는 미국에 사는 처제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가기 전에 바이올린 선생님께 부탁을 해서 줄과 활을 갈아달라고 했습니다. 바이올린의 실물을 본 건 그 다음 주 월요일이었습니다. 저도 바이올린 실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죠.


“아빠! 한번 연주해 볼까?”

“응.”

은채는 조심스럽게 꺼내서 턱 받침대를 바이올린에 부착했습니다. 그리고 턱에 끼고 연주를 했죠. 작은 별을. 전 두 번 놀랐습니다. 우선, 생각했던 것보다 바이올린 소리가 컸습니다. 다음으로는 은채의 바이올린 솜씨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습니다. 그야말로 희한한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제법 정확하게 소리를 냈고 음과 박자가 다 맞았죠.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제로 눈앞에서 바이올린을 본 건 대학 졸업 후 이때가 처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집안에 바이올린이 떡 하니 놓여 있는 건 생전 처음이었고요.

저 어릴 때만 해도 음악을 배우는 건 좀 사는 집 애들의 특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 주변엔 바이올린을 취미로라도 배우는 친구는 단 한명도 없었죠. 그래서 음대에서 기악이나 피아노 전공을 하는 친구들은 지레 집안이 좀 괜찮다고 생각했죠.


새삼 다짐하게 됐습니다. 내가 살아 온 기준으로 아이의 새로운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말이죠. 내가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이에겐 일상이 된 시대를 살고 있음을 또 다시 인정하게 됐습니다. 내 집에서, 내 자식이,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작은 별을 연주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제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화요일, 은채는 이 바이올린을 감전동까지 들고 가서 할아버지 앞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생일이 시월 말인데 그때 바이올린을 빌려서라도 연주해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죠. 개천절에는 광안리 삼촌 집에 가서도 연주를 했습니다. 삼촌은 열심히 박수를 쳐 줬죠. 연주 실황을 촬영해 미국에 있는 엄마와 친할머니에게 보냈습니다. 엄마도 생각보다 연주를 잘 한다고 놀랬고, 친할머니도 신기해 하셨죠.


은채는 악보집이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집에서도 연습할 수 있게 말이죠. 전 검색을 해서 집 근처 서점에 은채가 원하는 교재가 한권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얼른 사서 건네줬죠. 은채는 이 교재를 펴 놓고 가끔 연주를 합니다.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연주 준비를 하고 말이죠.


어쩌면 아이들은 부모의 걱정보다 학교생활을 잘 해낼 능력이 있고, 무엇이든 잘 배워나갈 지능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시간을 주고, 기회를 주고, 사랑과 칭찬을 주면 어느새 키도, 실력도, 몸도 마음도 쑥 자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은채가 언제까지 바이올린을 할지는 모릅니다. 전 셜록 홈즈 얘기를 해줬습니다. 아빠가 좋아하는 소설 속의 탐정인데 이 사람이 바이올린을 정말 잘 연주한다고. 사건이 잘 안 풀리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갈 때는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은채도 바이올린을 완벽하게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앞으로 살면서 마음이 힘들고 일이 잘 안 될 때 스스로 휴식을 주는 방법으로 바이올린을 사용하라고 말이죠. 그 때를 위해서 지금 즐겁게 배우고 연습하라고 말해줬습니다. 아빠는 한국의 셜록키언이라는 자랑도 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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