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은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직접 까서’ 먹는 걸 더 좋아한다. 두꺼운 껍질을 정성스레 벗겨내고 깨끗하고 예쁘게 분리된 과육을 먹는 즐거움이란 혀로 즐기는 맛 못지 않다. 새콤, 쌉싸름한 자몽은 맛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고 위장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먹지 못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다. 핑크빛을 내는 자몽의 색이나 상큼한 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과육을 즐겨 먹는 사람은 많지 않아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도 인기가 아주 많지는 않다.
단맛이 적은 자몽은 아무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에 손이 자주 간다. 수분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쌉싸름한 맛이 갈증을 달래주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내가 자몽을 처음 먹기 시작한 건 대학시절부터였다. 대학시절을 보낸 일본에서는 당시 자몽이 들어간 음료나 술이 인기였고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을 때보다 자몽을 접할 기회가 잦았다. 마트에서도 손쉽게 볼 수 있어, 여름이 오면 혼자서는 다 먹기 힘든 커다란 수박이나 일본에서는 먹을 수 없던 참외 대신 조금 비싸긴 해도 스위티자몽을 자주 사먹곤 했었다.
더위로 뜨겁게 달궈진 자취방에서 에어컨 바람 대신 창문의 미지근한 바람에 땀을 식혀가며 먹는 차가운 자몽은 여름하면 떠오르는, 자몽하면 떠오르는 추억 중 한 장면이다. 시간이 많았던 그 시절, 한 자리에서 3,4알의 자몽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까먹다가 뒤늦게 어지러움이나 속쓰림으로 고생한 것도 과거의 기억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대학시절 가장 즐겨먹은 과일 중 하나가 자몽이 아니었나 싶다. 값이 싼 바나나나 귤, 사과도 자주 먹었지만 여름이면 자몽을 정말 자주 찾아먹었다. 원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참외가 우리나라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갑자기 먹고 싶어했던 일, 한국으로 돌아가면 수박 한 통을 사서 혼자 다 먹겠다고 다짐했던 일도 그 시절의 추억이지만 그래도 유학시절하면 떠오르는 과일은 역시 자몽인 거 같다.
유난히 더웠던 교토의 여름, 그리고 바깥보다도 더 더웠던 자취방에서 선풍기 한 대 없이 그저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만 의지했던 그 시절에 집중보다 더 좋은 피서는 없었다. 자몽의 껍질을 한 겹, 또 한 겹 벗기다 보면 어느새 자몽 까먹는 일에 몰두하여 더위조차 잊게 됐었다. 그렇게 열심히 껍질을 벗겨낸 쌉싸름한 자몽의 탱글탱글하고 차가운 과육이 혀에 닿을 때마다 느꼈던 즐거움은 여러모로 여유롭고 산만한 지금의 생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자 맛이었다.
지금도 자몽을 먹을 때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껍질을 하나씩 까서 예쁜 모양으로 꺼내진 과육만 먹는 것을 즐긴다. 좋아하는 자몽을 1일 1자몽 한 지 열흘째, 그때 만큼 감동적인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 시원한 방에 앉아 수박과 참외를 두고도 굳이 자몽을 골라 먹는 맛이 나쁘지 않다.
꼭지가 달린 부분과 그 반대 부분을 자르고, 그 다음 남은 껍질은 여섯 조각으로 칼집을 내어 손으로 벗겨준다. 그후 아직 두껍게 덮힌 속껍질은 윗부분부터 벗겨내고 얇은 껍질만 남은 자몽 알은 반으로 갈라 나눈다. 그러고 나면 자몽의 안쪽에 칼집을 내어 과육와 껍질을 분리한 다음 한 알씩 먹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