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약한 영웅'이 있다

영웅은 먼 곳에 있지 않아요

by 은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일명 똥 통 양아치 소굴인 은장 고등학교에서는 서열 간 보기가 문을 연다. 새내기 5반 짱이라는 최효만이 그중 선두에 서서 휘젓고 다닌다. 늘 설치는 것은 요란하다. 속이 꽉 차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문무를 겸비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내면에서는 칼의 노래를 들을 만큼 아프고 식은땀은 숙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을 벼렸던 상흔인 문장을 남기어 우리는 장군의 인간적인 고뇌를 알 수가 있다. 자나 깨나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으나 그를 알아준 건 그 잘난 임금과 사대부가 아니었다. 속은 감수성이 풍부한 문을 가졌으나 시대의 아픔이 장군을 칼이 앞세워 전장에 머물게 했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는 고전의 문구가 있다.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만 봐도 알 수 있다. 학구파는 앞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과 눈싸움을 한다. 글자가 이기나 학구파가 이기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곱상한 학구파는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띈다. 군계일학이기 때문이다. 예쁜 꽃은 감상하면 탈이 날 리 없다. 꼭 건드려 부스럼을 만드는 어리석은 중생이 시비를 건다. 진짜 남자인지 확인한다나 뭐라나. 제 자리나 잘 지키면 그나마 으스댈 수는 있을 텐데 쓸데없는 치기를 부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연약해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연시은은 놀랍게도 다가온 폭력을 피하지 않는다. 당당히 맞선다. 뛰어난 두뇌로 분석한 힘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도구에 힘을 실어 상대를 제압한다.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한 학구파는 팔꿈치의 힘이 제대로 실린 각도로 반격에 나선다. 무기도 못될 하찮은 책가방 끈으로 상대의 손을 묶어 무릎을 꿇리고 만다. 힘을 과신한 최효만은 반항 심리가 꺾이도록 뺨을 맞는 굴욕을 당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이다.



재미난 웹툰을 찾다가 보게 된 이 약한 영웅은 왜소하고 연약해도 운동 좀 하는 짐승남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대리 만족에 꽤 통쾌하다. 선천적으로 약하고 작은 것은 스스로 주제를 파악할 줄 안다. 작은 만큼 큰 것보다 뭐하나 극대화한 장점을 만든다. 그걸 우습게 보다가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Gnothi sauton.’ 그리스어인 이 말은 '너 자신을 알라'이다. 스스로 무지한 줄 알면 지혜로울 수 있다. 스스로 무지한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 경거망동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연약한 시은이 은장 백사로 거듭난 광경을 보았다. 다른 것들보다 햇볕을 덜 받을 불리한 위치에서 심어졌다. 당연히 키가 작다. 다른 것들은 햇살에 나른해져서 오수에 빠질 때 이 녀석은 조용히 내공을 쌓았다. 얼마나 두뇌 플레이를 반복했을까. 최적의 일조량으로 저 몸 구석구석으로 양분을 빠짐없이 공급하고 엽록소를 생산할 계략을 짰을까. 이 녀석은 분명 연시은이 맞다.



다른 녀석들은 덩치도 좋아서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힘깨나 쓸 것처럼 생겼다. 번지르르한 외양을 위해 겉 근육은 키웠으나 속 근육인 내공은 키우지 않았나 보다. 연시은을 보라! 저 하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정기를 끌어올렸나. 작은 가냘픈 것이 덩치보다 앞서 결실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응원한다.



햇살 좋은 날씨에 모두 여유 만만할 때 약한 시은은 은장 백사로 거듭나기 위해서 수련했을 것이다. 모두가 아우성칠 때 휩쓸리지 않고 고요하다는 것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는 증거이다. 불필요한 쏠림이란 파도에 발을 담그지 않고 정도를 가는 건 쉽지 않다. 주변에서 자꾸 쑤시고 흔들고 눈총을 주기 때문이다.



남보다 못한 왜소한 환경이란 반그늘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이제 그는 덩치가 만만히 볼 조무래기가 아니다. 이름만 들어도 근육이 굳어버리는 은장백사로 거듭난 것이다. 가장 먼저 하얀 꽃을 피워냈으니 햇볕을 받아 태양 고추로 자랄 것이다. 덩치는 그가 남긴 발자취를 뒤따라야만 한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약한 영웅은 주위에 있다. 왜소증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을 뛰어넘는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있다. 연약한 걸 깨닫고 자각하면 자기만의 무기를 생산할 줄 안다. 험난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야 하기에 두뇌와 오감을 풀가동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특별한 무기 하나쯤 장착해야 할 당위성이 대두된다. 그것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시점에 와 있다. 나는 어떤 무기가 있는가. 장착하기 위해서 특별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약하지만 연마하며 내실을 꽉 채우는 이가 있다. 약한 영웅이 불의에 굴복하는 일이 없게 약하지 않은 영웅도 힘을 보탠다면 후속은 어떨까.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외면하지 않는 한 디스토피아가 되진 않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