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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과 환희

한 문장 속에 피어난 아기의 씨앗들이 뭉클

by 은후

<무럭무럭 연두>


생명이 이어 자라는 교실


http://m.kyilbo.com/353642


어제가 참 아련하다.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처럼 손끝에 감겨온다. 달빛이 부드럽게 창을 어루만지던 수요일 저녁이었다.


지난주 결석했던 수강생 S 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수업 시작보다 한참 이른 시간, 그 발걸음엔 설렘이 나릿나릿 실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눈인사를 나누는 순간에 포착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감기 기운이 감돌았다.

혹시나 하여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감기 걸리셨어요? 혹시 모르니 항생제 복용은 신중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그녀가 작은 고백을 건넸다.

“네, 감기에 걸려서 지난주에 쉬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어떻게 아셨어요? 소식이 왔어요!”

숨이 멎는 듯했다. 왼 가슴에 얹은 손끝으로 벅찬 즐거움이 파도처럼 부딪혔다.

“와, 정말요? 축하해요! 저도 그랬거든요. 아기가 찾아왔을 때 몸이 아팠어요. 그나저나 그 임신 테스트기가 뛰어난 전령사였군요.”

눈가에 고인 환희의 감정이 교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맞아요. 그날 밤에 아기가 찾아왔어요.”


감히 감기 따위가 훼손할 수 없는 생명을 품은 목소리는 수업의 시작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정각을 알리는 시계 알람이 울렸고 자연스럽게 수업을 시작했다. 지난주에 내어준 숙제를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생명에 대한 주제가 하나둘 올라왔다. 교실은 글쓰기의 공간을 넘어 따뜻한 기적의 순간을 맞이한 작은 성소가 되었다. 그 풍경은 자연스레 지난달 어느 수요일 밤을 소환했다.


창밖으로 별 하나가 먼저 나와 교실을 엿보던 밤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기적을 품은 L 님이 가방에 넣어온 임신 테스트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갑내기 아내와 오랜 세월 부부의 인연을 이어오며 애틋하게 기다렸던 생명이 다섯 해를 지나 그의 손에 닿은 거였다. 처음엔 옅은 분홍색이었을 두 줄을 박은 플라스틱이 별 하나를 심은 듯 그의 손에서 하얗게 빛났다. 손 글씨로 정성을 다해 적은 날짜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들이 찾아온 그날의 기쁨이 A4 용지 위의 글보다 더 진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여전히 복받친 기쁨에 젖은 얼굴로 그는 수강생들과 감동의 순간을 나누었다. 교실은 경건하게 숨을 고르며 한 생명이 탄생하는 찰나의 떨림을 받아 안았다. 분홍빛은 자주색으로 시간을 덧입었지만, 그날의 환희는 더 진해져 달빛처럼 잔잔히 스며든다. 창작의 터전인 공간이 난임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졌던 수많은 삶의 조각을 문장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마음들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눈빛 하나하나가 은은하게 생명의 움이 트는 공간을 데웠다.

더는 플라스틱이 아닌 분홍의 꿈을 가져온 기운이 파도를 치며 밀려와 또 다른 이에게 전해졌다. 시험관 시술을 앞두고 있던 또 한 명의 수강생에게 기적처럼 생명이 날아든 것이다. 긴 고요 끝에 찾아온 작은 울림에 ‘엄마’라는 뜨거운 이름을 선물 받았다. 기쁨이, 희망이,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글이 자라고 글자 사이에서 생명이 움트는 이 교실이 뭉클하다. 단어와 문장을 키우고 아기의 씨앗을 품는 이곳은 사랑과 인내, 기다림과 기쁨이 교차하는 희망의 성지가 되었다. 작가의 탄생과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한 공간에서 함께 울려 퍼지는 이곳의 떨림은 한 가정의 기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사회를 따스하게 적시는 물결로 번져간다.


난임의 고통은 결코 한 부부의 불운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아픔은 가정의 균열을 낳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 달방 교실에는 그 어둠을 뚫고 작고 따뜻한 빛이 들어왔다. 여기서 태어난 글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보듬으며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조용히 속삭인다.


L 님의 미소가 모성의 태를 감싸 안고 우리 사회에 새 생명의 옹알이를 퍼트리는 한 송이 꽃만 같다. 달빛 아래 피어난 이 특별한 에피소드가 창작의 열정과 생명의 신비가 어우러져 전례 없는 서사를 만들어갔다. 우리는 함께 한 사람의 서사에서 파생된 사회의 희망을 한 목소리로 적는다.


몸을 풀고 날씬해진 달이 제대로 된 창작물을 보고 싶어 도끼눈을 뜨고 있다. 생명과 문학이 손을 맞잡는 이 교실에서 생명의 도화선이 터지는 듯한 글들이 쏟아지길 기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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