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보내준 음식이 상했다. 처음부터 너무 많아서 상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준비하는데 공이 많이 드는 음식인 걸 알아서 빨리 먹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혼자 살고 약속이 있으면 외식을 하고 하루에 저녁 한 끼나 겨우 집에서 먹는다. 순식간에 며칠이, 몇 주가 지나고, 겨우 저녁을 차리려 열어본 냉장고에서 상한 음식을 발견했다. 분명 손이 많이 갔을 음식을 쓰레기봉투에 담으면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그러게 왜 애초에 이렇게 많이 보냈어, 탓을 해보기도 하고. 그 생각에 또 미안하고. 매번 나만 미안한 관계 같아서 또 기분이 좋지 않고.......
언니에 대해 알고 있는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면 괜한 얘기를 하게 된다. 본가에 오래 머물지 않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대충 얼버무려도 되는 얘기들을 굳이 솔직하게 하게 된다. 본가에 가면 할머니랑 언니가 계속 말을 걸어서 미치겠다. 둘 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고 있다는 건 신경도 안 쓰고 자기 할 말만 한다. 너무 시끄럽고 대꾸해 주기도 힘들다. 스트레스 때문에 이명이 들릴 때도 있다.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것 같다. 꾹 참는다. 그래서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혼자가 되면 가족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게 미안하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는데 싶고.
왜 가족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언제나 죄책감으로 끝날까. 이 죄책감을 덜고자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또 다른 방식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긴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가족과 가까이 있기가 힘이 든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저 멀리 어딘가에서 알아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도 사랑일까? 친구에 대한, 애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주로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이 더 큰 사랑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가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미안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받는 게 억울하기도 하다.
최근 결혼한 친구의 집들이를 갔다. 워낙 오랜 연애를 하고 결혼한 친구이기에 결혼을 하고 달라진 점이 과연 있을지 궁금했다. 몇 가지 답변을 들었는데, '원가족에서 분리됐다는 해방감'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집을 떠나 혼자 산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원가족과 분리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게 약간은 놀라우면서도 나라고 크게 다른가 싶기도 했다. 내가 선택한 사람과 법적인 가족으로 묶이는 일을 모두가 원하지는 않는 세상이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결혼을 하고 싶었다. 원하는 시기나 자녀 유무는 변할 때도 있었지만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 왜 꼭 결혼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을 때 '나 아플 때 수술 서류에 사인해 줄 사람이 서울에 없어서'라고 말했는데, 사실 동생도 서울에 있고 사촌언니도 서울에 있고, 그런 건 어떻게든 해결될 문제이지 않나. 친구의 답변을 들으니 내가 원했던 것도 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내 가족을 꾸림으로써 원가족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지고 싶다. 내가 선택한, 가까이 있어도 힘들지 않은 사람과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애정적으로 칭칭 감겨서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다. 그 속에서 얻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사랑하지만 가까이하기 힘든, 많은 경우에서 죄책감을 안겨주는 나의 원가족과 적당한 거리를 갖고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