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지만 미워하진 않아 feat. 브로콜리너마저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내가 언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적었던 글에는 ‘이러이러한 귀찮고 어려운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언니가 좋다’는 내용이 종종 보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아한다’가 아니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였던가, 아빠, 엄마, 나, 남동생 4명만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안온함. ‘가족사진’을 검색하면 샘플로 나오는 ‘1남 1녀의 4인 정상가족’ 같은.
순간 ‘언니가 없었다면 지금 같은 시간이 삶에 훨씬 많았겠지?’하는 생각을 하고는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너무 섬뜩하게 느껴져서 몸서리를 쳤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언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언니는 네 가족이잖아. 가족을 사랑해야 하잖아. 너 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언니를 싫어해? 왜? 언니에게 지적장애가 있어서? 너 정말 나쁘다. 소름 끼치게 나쁘다.
내 속에 나쁜 생각이 있다는(많다는) 걸,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건 왜 이렇게 힘든 일일까. 제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져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요.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와서는 내가 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가족 구성원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그 사람의 장애유무와는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덕분에. 상담을 받으며 ‘혜은 씨는 부모가 아니잖아요. 부모의 책임과 사랑을 형제자매에게 똑같이 요구할 수는 없죠.’라는 말을 들은 덕분에. 여러 경험들이 모여서 ‘세상은 둘로 나눠지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당신을 미워하는 게 아닌 것처럼’이라는 가사를(브로콜리너마저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中) 이해하게 된 덕분일지도.
여전히 P도 언니도 좋아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P가 가져오는 문제들이 P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 P를 향한 시선에 나의 역사, 나의 편견이 덮여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의식하면서 P를 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문을 쾅 닫고 나가 내 인사도 받아주지 않던 P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며 4개월 만에 돌아왔다) ‘혜은아 내 티켓 예매해줘’라며 나를 무슨 티켓 자판기로 아는 언니의 전화가 너무너무 귀찮고 짜증 날 때가 있지만 심호흡 한번 하고 ‘그래 언니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공연 보는 동안은 전화 안 하겠지.’ 생각하며 예매를 대신해주고 있다.
다른 상담 선생님 한 분이 말씀하셨다.
“착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요. 도와주는 사람이 되면 돼요. 도와주는 사람이 항상 착한 사람일 필요는 없죠.”
여전히 순수한 호의와 순도 100%의 친절로 P와 언니를 대하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도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거나 엄청나게 착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거야. 좋지 않은 마음을 안고서도 함께할 수는 있는 거니까. 호의의 순수성보다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으며. 계속 같이 있을게.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될 게. 뒤섞인 마음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