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그릇

모락모락 연기처럼

by 엄마참새

긴 여름 그보다 더 긴 어린이집 방학, 엄마 집에 갔다. 아이들은 모처럼 티비도 간식도 넘치게 즐긴다. 마당에서 물놀이를 할 요량으로 계획한 할머니집 방문은 쏟아지는 비에 그저 에어컨 바람아래 종일 뒹굴 뒹굴이다. 나도 그 옆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다. 막내는 배도 부르고 노근노근해지니 잠이 들었다. 아이를 재우려 작은 방문을 여니 건조대에 빨래가 있어 대충 걷고 살금 아이를 눕힌다.


마른 옷을 접어 서랍에 넣으려다 "엄마, 이거 어디에 넣어야 해?" 넘치는 옷가지들을 보고 잔소리가 시작된다. 돌아서서 후회할 거면서 엎질러지면 담지도 못할 거면서 엄마 집에 오면 이렇게 퉁명한 말이 쏟아진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서랍을 나와 옷걸이에, 옷걸이가 부족해 의자나 온갖 걸이에 넘치는 옷과 분명 오래도록 입지 않았는데 언제고 입을 거라는 옷들이 말이다. 옷 좀 버리라는 말에 놔두라며 요지부동이던 엄마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옷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불편한 옷, 입지 않을 옷들을 정리하다 보니 대형 비닐 두 봉지가 부족하다. 서랍에 여유가 생기니 한눈에 보이게 정리도 하고 발동이 걸린 엄마는 오래된 양말이며 화장품도 꺼낸다.


정리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 할머니 그릇을 씻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면 엄마는 부엌에 있는 컵과 그릇을 꺼내 바닥과 안쪽 사이사이 묵은 때를 쇠 수세미로 박박 씻었다. 그렇게 씻어도 다음 명절에 가면 시커먼 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지만 엄마는 나이가 들면 이런 게 잘 씻기지 않는 거라며 매번 언제나 재빠르게 그릇부터 씻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은 더러운 그릇을 보면 분명 싫은 소리를 해댈 아들들과 손주들에게서 할머니를 구하는 것이었다. 귀경길이라는 빡빡하고 긴 행렬 속에 지쳐 고향에 오는 기쁨보다 고단함으로 가시 돋쳐있던 마음에게서 마음 상할 말들을 걷어내는 일 말이다. 그릇을 다 씻고 나면 음식장만이 시작됐다. 정지(경상도 사투리로 부엌)에는 할머니가 손수 만든 두부며 도토리묵, 식혜와 떡이 이미 커다란 대야에 가득 있었고, 몇 날 며칠을 만들었을 음식들이 엄마가 씻어둔 그릇에 놓여 허기를 채우게 했다. 그제야 마음은 느긋해지고 어른들의 화투판이 시작되었다. 나는 동생 손을 잡고 동네 어귀로 나가 아빠가 다닌 작은 학교와 낮은 또랑 어디서 동네 아이들을 만나 놀았다. 집집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저녁 짓는 온기가 온 마을을 감쌀 때까지 시골의 아이가 되어 놀다가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언제나 그런 풍경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모락모락 연기가 온 마을을 포근히 감싸던 그 풍경 안에서 할머니의 정지에 가득했던 음식과 할머니의 그릇을 씻던 엄마를 닮은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오래전 할머니의 그릇처럼 엄마와 어머니댁에는 수시로 닦아내던 방바닥에 먼지가 앉고 씻기지 않는 묵은 때가 묻어가고 있다. 부지런히 할머니를 구하던 엄마처럼 재빠르지도 못하고 살갑지도 않은 나는 그저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나이 드는 엄마와 어머니의 예전 같지 않음을.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것을 바라본다. 부지런하던 며느리와 딸들은 사라져도 어쩔 수 없는 것을 괜찮다 여기는 마음은 여전하기를, 오래도록 너그러운 사랑은 남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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