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차가 멈추던 날

by 은진

지금은 차로 10분이면 닿는 거리. 예전엔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를 지나, 갈림길에서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드니 저 멀리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이 더위에 걸어가다니, 누구일까?


가까이 다가가니 낯선 남자였다. 속도를 늦췄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혹시 그가 여자였다면, 창문을 내려 “어디 가세요?” 하고 물었을까? 잘 모르겠다. 요즘 세상은 낯선 이에게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오가는 이도 드물고, 앞에는 어두운 나무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면 더더욱.

그 순간, 오래전 이 길에서 있었던 장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꽤 멀었다. 마을 끝 외딴곳에 살았고, 함께 걸어줄 친구는 없었다. 친구들과 나란히 걸으며 웃고 떠드는 모습은 늘 부러운 풍경이었다. 대신 나는 생각하고, 상상하고, 길가 주변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그날도 혼자였다. 마음속에서는 늘 빌딩가를 당당히 걸었고, 언젠가 멋진 누군가가 나타나 내 옆에서 발을 맞춰 줄 거라 믿었다. 호박마차는 아니더라도, 운명이 바뀔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대는 무거운 책가방을 조금은 가볍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꿈이었지만, 그 덕분에 긴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검은색 중형차 한 대가 옆에 멈췄다.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고, 처음 보는 남자가 “어디 가니?” 하고 물었다. 거기까지 태워주겠다는 말에, 다리는 풀리고 기운마저 빠져 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차에 올랐다.


“이 근처에 사니? 학교는 멀어?”

남자는 인상도 좋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멀리 학교를 다니는 것도 모자라 혼자 걸어서 통학한다니 대단하다며 칭찬했다. 그와 나눈 대화는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누구 집 딸이냐, 몇 살이냐, 대학은 어딜 갈 거냐 등 신상 조사처럼 캐묻거나 잔소리를 하는 어른들과 달리, 품위가 있었다.


나중에야 들었다. 그 길 중간, 숲과 마을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누군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소문을. 실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어른들이 겁을 주려고 만든 이야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스산한 기운이 스며들면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하지만 내겐 그 길이 가장 짧은 코스였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내려 달라고 했다. 차가 멈췄는데, 아무리 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황한 나를 보며 아저씨는 “그 문이 잘 고장 난다니까” 하며 운전석을 빠져나와 마치 누군가를 정중히 배웅하듯 직접 열어주었다.


그날 나는 위험한 낯선 사람일 수도, 친절한 이웃일 수도 있는 아저씨 차를 탔다. 첫인상을 믿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날은 고마움이 먼저였다. 그는 실제로 따뜻한 추억을 남겨 주었다. 아찔한 일은 없었고, 무사히 귀가도 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 한쪽에는 약간의 설렘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절대 그 차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순진했고, 세상은 지금보다 느슨했다.


오래전부터 시멘트로 덮였던 길은 이제 군데군데 파이고 갈라져 누더기처럼 보인다. 키 큰 소나무와 잡목이 빽빽하게 서 있고, 길옆 숲은 여전히 고요하다. 늘어진 나무들이 만든 터널은 서늘하고, 걷는 사람도 드물며 자동차만 가끔 지나간다. 나도 차창 밖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흘려보내며 지나친다.


길은 여전히 집까지 이어져 있다. 변한 건 길이 아니라 나였다. 그 시절엔 낯선 이의 차에도 망설임 없이 올랐고, 때로는 처음 보는 이와 한참을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나누길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 길 위에서 갈증을 달래고 꿈을 그리던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러나 지금도, 그 길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걸으며 묵은 이야기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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