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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자의 이름을 훔친 여자

<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by 은주

Catherine Davidson.

‘사장님이 한국에 갔는데 왜 여권을 두고 갔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리처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불법 체류자 신분, 해결해 주겠다고. 이름까지도.”


그 말에 담긴 뜻의 의미를 깨달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진실을 파헤치기엔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든 걸 잃어버릴 것 같아 겁이 났다. 어차피 합법적 비자가 필요했기에 그녀 이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캐서린의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에서 현금을 찾을 때마다 점점 그녀가 되어 갔다. 사진 속 여자의 머리 스타일로 바꾸었다. 그리고 미소도 흉내 내 보았다. 캐서린 데이비슨 그것이 그녀의 새 이름이었다. 사업자 명의도, 집 명의도 모두 캐서린 데이비슨이었다. 그러고 애플트리 하우스로 이사 온 후, 기록상으로도, 영국 정부의 데이터베이스 안에서도 그녀는 완벽한 캐서린 데이비슨이었다. 신유진은 없었다.


어학원 처분 금액으로 초콜릿 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영원히 캐서린 데이비슨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애자가 면접 오기 전까지 모든 비밀은 감춰진 줄 알았다.

“혹시 사장님 성함이… 캐서린이 맞나요?”

직원 구함을 보고 찾아온 여성이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질문했다.


“네, 맞아요. 제가 캐서린 데이비슨입니다.”

20년 넘게 그녀로 산 유진은 자신이 그녀인지 그녀가 자신인지 자신도 헷갈렸다. 유진은 일자리가 절실히 필요해 보이는 이 한국 여성에게서 26년 전 불법으로 어학원에 취업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그 후 애자의 밝고 스스럼없는 성격이 둘을 금세 친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애자는 가게 운영에 소질이 있어서 캐서린은 애자를 믿고 가게를 맡길 수 있었다.


어느 날, 애자의 방문이 유진의 하루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래 묻어두었던 비밀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듯했다.

“신. 유. 진”

애자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심장은 방금 달리기를 마친 것처럼 뛰었고,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애자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런던 어학원에서 접수원으로 일했던 당신이 어째서 리처드 부인 캐서린의 흉내를 내고 있죠?”

거짓이 너무 오래 몸에 배어버려서 진실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파랗게 질렸다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애자는 그 모습에 확신을 가진 듯 덧붙였다.


“당신 캐서린 아니잖아. 사장님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어.”

4년 동안 알고 지낸 애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접히던 젊은 여성이 겹쳐 보였다. 26년 전, 건물을 청소하던 그녀는 반짝이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주름이 생겼지만, 눈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이제 기억이 나나 봐. 난 그때 캐서린이 나에게 커피도 타 주고 추운 겨울에는 유자차도 끓여 주어서 늘 기억하고 있었어. 근데 당신이 캐서린의 이름을 쓰고 있는지 오늘은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크게 흔들리며 입술 끝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리처드는 이혼했어. 비자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그리고, 내 영어 이름이 캐서린이야.”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애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애자는 유진과 리처드가 떠난 후 한동안 뉴몰든에서 떠돌았던 소문을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 상관없어. 당신이 진짜 캐서린인지 아닌지는 홈 오피스*에서 확인해 주겠지. 지금 당장 전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애자는 일부러 끝을 리며 말했다.


“우리 친구인 줄 알았는데….”

“친구였지. 지금 내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 리처드가 나를 협박하고 있어”

캐서린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빛이 감돌았지만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애자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말했다.

“침묵의 대가가 얼마쯤 될지….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

*홈오피스 : 영국 내 이민국. 여권 발급, 비자(비자) 및 이민 정책을 관장하는 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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