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여기 혹시 애자 언니 안 나왔나요?”
가게에는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있던 애자 언니와 달리, 푸석푸석한 금발 머리를 풀어헤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영국 여자가 앉아 있었다. 껌을 씹기도 하고 풍선을 불기도 하며 무료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초콜릿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어, 애자요? 그만뒀는데요.”
“그만뒀어요? 가게를 팔았다는 말인가요?”
점원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아니요. 애자가 가계를 어떻게 팔아요. 주인도 아닌데. 갑자기 그만뒀는데 저는 잘 모르죠. 캐서린이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일하는 시간을 늘려달라고만 했어요.”
"나는 무슨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그녀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불만 섞인 푸념을 했다.
자신의 일하는 시간이 늘어서 난 것이 애자 언니 탓인 양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는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언니가 주인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예요? 같이 교대 근무하던 직원이었어요.”
그녀의 강한 스코틀랜드 억양 때문인지 귀찮은 말투 때문인지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발끝이 휘청거려 옆집 커피숍 의자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정신이 맑아졌고 지난 넉 달을 되돌아보았다. 주인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그녀 자신을 꾸며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또 다른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캐서린 생일 이후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처음 애자 언니를 만난 건 초콜릿 가게 〈호텔 쇼콜라〉였다. 바닷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소한 생선 냄새가 스며드는 거리 끝자락에 형광 간판이 걸린 <Rock Fish>라는 생선구이 식당이 있었다. 런던의 절반 가격으로 훌륭한 생선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근처의 유일한 커피 전문점 옆에 애자 언니의 초콜릿 가게가 있었다.
그녀는 은은한 캐러멜 색상의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는 매일 드라이한 듯 단정했다. 말투는 부드러웠고, 손끝의 동작 하나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초콜릿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그녀를 보며, 영국의 땅 끝자락 중에서도 바다 끝, 외국인들 틈에서 자리 잡은 이 한국 여성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가게 한편에는 여러 번 니스 칠을 한 나무 테이블 위에 광이 나는 은쟁반이 놓여 있었다. 은쟁반 위로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는 브랜드인 로열 알버트의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와 차를 마시며 담소하기 좋은 장소였다. 초콜릿을 사고 나면 언제든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간이 좋아 필요 없는 초콜릿을 사러 여러 번 들렀다. 애자 언니와의 대화는 세상 근심을 사라지게 했다.
심드렁한 날이면 함께 와인 바를 찾기도 했다. 35파운드만 내면 연어초밥과 술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곳에서 마감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영어를 쓸 때는 조용한 요조숙녀 같았지만, 한국어를 쓸 땐 대구 사투리를 썼다. 그 반전 매력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게 하기도 했다.
돈 많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러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만큼이나 돈 많은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누가 주식 투자로 얼마를 벌었다더라, 누가 돈이 얼마 있다더라는 이야기들은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나의 전직인 회계사 연봉이 얼마였는지, 또 내가 얼마나 돈을 가졌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돈이 많으면 자랑이 되고 없으면 동정을 받는다는 걸 알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리처드와 캐서린의 이야기를 가끔 했지만, 그 또한 내 관심사는 아니었던지라 흘려들었다.
“리처드는 알아 두면 도움이 되는 사람이야. 레딩 근처에 68개 부동산을 소유한 부자야. 예전엔 한국 사람 상대로 유학원이랑 어학원을 운영했대. 캐서린이 주로 사업을 했고 리처드는 영어 선생으로 지냈다고 하더라고. 사업이 꼭 잘 됐던 건 아닌데. 리처드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팔자가 뒤집어졌지. 어마어마한 부자랑 결혼했는데 재혼한 지 3년 도 채 되지 않아서 양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친 아들 명의로 된 부동산 일부를 변호사로 써서 리처드 명의도 돌렸다고 하더라고. 한동안 좀 시끄러웠어. 암튼 그 덕에 이곳 토키 바닷가 근처의 집은 모두 그의 소유가 됐지.”
“언니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다 알아요?”
언니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캐서린이랑 나랑 동갑이거든. 이곳에 와서 서로 의지하며 친하게 지냈어.”
부잣집 사모님 캐서린을 동경하는 듯한 애자 언니의 모습이 거북했던 때도 있었다.
‘리처드는 요트 여행을 갔어.’
언니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뜬금없는 그 말이 계속 생각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도 리처드도 사라졌다.
캐서린 생일 일주일 전 일이 생각났다. 그날도 평소처럼 초콜릿을 고르고 있었는데, 애자 언니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리처드가 서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어머, 리처드 씨! 또 만나네요.”
오가며 자주 마주치는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는 목례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리처드를 알아?” 언니가 물었다.
“이웃이에요. 애플트리 하우스 주인이에요. 부자인 것 같아서 친하게 지내보려고요.” 농담조로 말했지만, 언니는 웃지 않았다.
“언니는 어떻게 알아요? 혹시 언니가 말한 리처드 씨가 저 리처드예요? 세상 정말 좁네요.”
영국에서 리처드는 흔한 이름이라 언니가 이야기할 때도 흘려들었다.
“한국인 부인도 모임에서 같이 보면 좋겠네요. 이참에 한국 여성 모임 하나 만들어볼까요?”
“그것도 좋지… 하지만 캐서린은 한국 사람이랑 어울리려 하지 않을 거야.”
앞뒤 맞지 않은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한국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은 그녀가 애자 언니와 친한 것도 모순 같다고 지적하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캐서린은 나를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했으니까 그 말은 틀릴 수도 있다. 물론 리처드가 초대했지만 그녀는 거절할 수 있었다.
리처드와 애자언니가 사라진 것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을 탓을 하며 다시 초콜릿 가게로 갔다. 이번엔 한국 전통 문양의 열쇠고리 한 세트와 외국인 친구들에게 주려고 산 ‘복’ 자가 새겨진 파란색 복주머니를 챙겨 가게로 향했다. 가게가 좀 한가해 지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노랑머리는 나를 또 왔냐는 듯 쳐다보았다. 초콜릿 사러 왔으니, 손님을 내쫓겠나 싶어서 아무 초콜릿이나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 준비해 온 선물을 쓱 내밀었다.
“이거 외국 친구들 만나면 주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거예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가식적으로 씩 웃는 나를 못 이기는 척 가져온 물건을 쳐다봤다. 선물을 본 노랑머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소까지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예쁘네요. “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어보았다.
“소설을 쓰는 중이에요. 알고 있는 것 좀 알려주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좀 될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리처드와 애자 언니가 같이 사라진 게 이상하지 않아요?” 가십을 얘기하듯이 소곤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녀 역시 맞장구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 한 달 전이니까. 리처드도 그 후로 가게에 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번쩍 뜨며 이야기했다.
“아 근데 한 달 전이면 캐서린 생일날 파티장 아르바이트 좀 해달라고 리처드가 부탁해서 그날 샴페인 담당 서빙을 제가 했거든요.”
갑자기 그녀가 노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샴페인을 나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 맞아요. 저도 그때 참석했는데” 더 얘기해 보라는 듯 맞장구를 쳤다.
“애자는 아닌데. 그 한국 분.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왜 남작 부인이라고 비서랑 경호원 대동해서 나타나신 분 있잖아요. 그분 리처드랑 좀 다투는 걸 들었어요. 제가 있는지 모르고 언성이 좀 높아졌는데. 두 분이 이전에 아는 사이인 것 같았어요. 그게 좀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일일까 별일은 없었어요.”
“고마워요. 지은이예요. 그분 이름은. ”
남작 부인과 리처드가 다퉜다는 말에 그날을 되짚어 보았다. 그날 주워 온 은색 커프 링크스(cuff links*)와 남작 부인과의 다툼이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남작 부인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 커프 링크스(cuff links*): 드레스 셔츠의 소매에 일반 단추 대신 쓰이는 장식 단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