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처음 집 근처에 이사 온 여자가 자신의 이름이 이유진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가늘게 손이 떨리는 걸 리처드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래전, 한국 여권 위에 찍혀 있던 그녀의 이름이 유진이었다. 신유진.
철없던 스물넷, 영어 강사였던 남자 친구를 따라 런던에 왔다. 한국에 있을 때 그는 늘 직업에 불만이 많았다.
“강사 일은 그냥 취미야, 잠깐 하는 거지. 영국에 가면 전공을 살려 금융업에 종사할 거야.” 하지만 막상 런던에 도착한 후 알게 된 것은 그는 아무 능력도 없는 백수라는 것이었다.
집세, 식비, 세금 등 필요한 비용은 모두 그녀가 지불해야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매일 저녁 술을 먹고 아침 늦게까지 퍼질러 잤다. 편의점 카운터 뒤에서 물건을 정리하거나, 식당 바닥을 닦으며 벌어들인 돈으로 하루를 버텼다. 헤어짐이 두려워, 소파 구석에 구겨져 있던 다른 여자의 흔적도 애써 눈 감고 지나가던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방 보증금과 공통 계좌에 있던 잔액을 깨끗이 비우고 사라졌다. 남은 건 텅 빈 집과 몇 푼 안 되는 동전뿐이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졌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영양실조였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익숙해질 무렵 퇴원했다.
갈 곳도 없었고 병원에 있는 동안 영국 체류 비자는 만료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비행기 삯만 벌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지만,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을 누구도 고용해 주지 않았다. 뉴몰든* 근처의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런던 어학원>에 취업했다. 한국인 여성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영국인 남편인 리처드가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유진이 불법 체류자 신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학원 접수 데스크에 취업시켜 주었다. 런던에서는 종종 법정 급여보다 적게 주고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이 있었다. 이곳도 그중에 하나였다. 캐서린은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돈에 관해선 철저한 사업가였다.
어학원 접수 데스크에서 일하는 기간이 영국 생활 중 가장 생기 넘쳤던 시절이었다. 유진은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리처드를 동경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몸에 밴 예의가 좋았다. 자신의 전 남자 친구와 달리 어른 같았다. 문에서 마주치면 어김없이 뒤로 살짝 돌아 문을 잡아주었고, 언제나 눈을 맞추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유진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던 길고 긴 사연을 끝까지 경청했고, 끝내 울먹이는 유진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그의 부인은 출장이 많았다. 그리고 학원 운영과 돈 문제로 그와의 싸움이 잦았다. 그때마다 유진은 그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었다. 둘은 그렇게 정이 들었다.
“곧 정리할 거야. 이혼하면, 너와 결혼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네 비자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유진은 어차피 갈 곳도 없었기에 반복되는 그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리처드의 부인 캐서린은 반듯하게 다려진 바지와 재킷을 입고 다녔고, 손톱 하나하나까지 가지런하게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사업가 특유의 단정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알이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볼 때마다 부러움을 넘어 질투의 감정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그녀의 것이 될 것만 같은 희망에 부풀었다.
캐서린의 부재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어느 날, 리처드가 갑자기 청혼했다.
“캐서린은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어. 이제 당신과 결혼할 수 있게 됐어”
신혼여행과 거리가 먼 여행지인 다트 무어로 간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6개월을 기다렸기에 어디든 괜찮았다. 그곳은 어디서부터 길이고, 어디까지가 들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장소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야 위로 작게 구부러진 길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 같은 곳이었다. 신혼여행에 낭만보다는 이 늦은 밤 그는 왜 이곳에 왔을까?라는 질문만 남았다. 유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이곳 바닷가 근처의 집을 샀고 그 집을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라고 덧붙였다.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플트리 하우스를 본 순간 상관없게 느껴졌다.
이사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리처드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발끝까지 들썩이며 다가와서는 드디어 양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고 흥분해 말했다. 더 이상 어학원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고도 덧붙였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 즐거워할 일인가 싶었다. 몇 달 전 양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울던 그의 슬픔은 진심이었을까?
캐서린은 서둘러 떠났는지 옷방은 여기저기 흐트러진 옷가지로 지저분했다. 들어가 본 적 없던 옷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문을 열자, 쌉싸래한 바다향인지 과일향인지 구분하기 힘든 진한 향수 냄새와 쇳내가 섞여 코끝을 서늘하게 스쳤다. 옷 가운데 오래된 가죽 코트가 보였다. 코트에서 나는 냄새인가 싶어 코트로 손을 뻗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묵직한 것이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고 유효 기간이 한참 남은 캐서린의 여권이 있었다.
Catherine Davidson.
‘사장님이 한국에 갔는데 왜 여권을 두고 갔지?’ 의문이 떠올랐다.
*뉴몰든: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영국의 코리아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