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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 이야기

<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by 은주

한 명이 아는 순간 비밀은 없다.


- 캐서린의 50세 생일 일주일 전 지은의 집 거실


리처드는 갑자기 찾아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손에는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지은은 비서를 물리고 거실에 리처드와 둘이 앉아 있었다. 장미꽃무늬 찻잔에 담긴 차는 식어 있었다.


“남작 부인, 이번엔 선택권이 없어요. 내 요구대로 하든지, 아니면… 난 내가 아는 걸 기자한테 넘길 수밖에 없어요. 아무도 모르는 남작 부인의 비밀인데 어떤 잡지사가 마다하겠어요?.”


그의 말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고 초초해 보였다. 남작 부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애써 침착하게 되물었다.

“원하는 게 뭐죠?”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액수를 말해도 될까요?”

그가 돈을 요구하자 지은은 의아했다.

“양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돈이 필요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왜 미국을 자주 갔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말해야 알아듣냐는 듯 입 모양이 비틀어지며 말을 이었다.

“투자금을 메우려고 도박에 손을 좀 댔죠 …”

“얼마면 되죠?” 그가 물러날 것 같지 않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입 다물게 할 만큼만 주시면 돼요. ”

그녀가 일정 금액을 제시하자, 그는 만족한 듯 거래일과 방법을 정하고 돌아갔다.


남작의 본가가 있는 토키로 이사 온 것이 12년 전이었다. 알츠하이머 환자를 위한 자선 행사에서 리처드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시절이었다. 지은의 과거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가 정희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술집 바닥, 미군과의 결혼, 폭력, 이혼, 미국의 작은 아파트, 월 스트리트의 바. 그 기억들은 절대 달콤하지 않았다.


1980년 겨울, 정희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생계를 위해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손가락질했지만, 정희에게 그 잣대는 무의미했다. 돈과 생존을 위한 날카로운 감각만이 그녀를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곳에서 만난 미군과 결혼했지만 그의 폭력으로 인해 10년 만에 이혼했다. 결국 아메리칸드림은 환상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그녀의 이름은 지은이었다. 바 안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남성을 찾아 눈길을 끌되, 절제된 매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영국인 남작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그는 그녀의 단단한 태도에서 세월 속 단련된 생존력과 자기주장을 읽었다. 지은 역시 그의 눈빛 속에서 단순한 나이와 부를 넘어선 깊은 경험과 성숙함을 느꼈다. 그는 월 스트리트에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선조 덕분에 남작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은의 나이 35세, 남작은 20살 많았다.

그는 부유했지만, 그 부를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은은 사랑이라기보다 깊은 존경을 느꼈다.

3년 후,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자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프러포즈했다.

“당신 안에는 언제나 사랑을 갈망하는 눈빛이 있어요. 어떤 상처인지 묻지 않을게요.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요.”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했지만, 사랑을 배제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정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분과 학력, 새로운 이름까지 모두 만들어 낸 배경으로 귀족 사회의 문을 두드렸다.


남작의 영국 집 정원에는 4대의 헬리콥터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멀미가 심한 남작은 주로 요트 나 크루즈 여행을 하거나 자동차 대신 헬리콥터로 이동했다. 집 내부는 부부 침실과 파우더 룸을 제외한 7개의 손님 방과 사우나가 있었다. 거실은 정원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너머엔 바다가 보였다.

자녀가 없던 두 사람은 재능 있는 학생들을 위해 기부를 했고 여행을 다니며 노년을 보냈다. 그가 70세의 나이에 심근 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녀 인생의 가장 눈부신 나날이었다. 그녀는 막대한 유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사람들은 미망인이 된 그녀를 위로했고 많은 기부에 존경을 보냈다.


리처드가 나가고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벨벳 드레스, 진주 목걸이, 반듯하게 묶은 머리. 표정은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눈동자 속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돈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돈만 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돈을 주고 나면 그녀의 과거를 도구로, 존재 자체를 위협하며 지배하려 할 것이다. 내가 일궈놓은 명예를 짓밟는 건 괜찮지만 나로 인해 남작의 가문이 당하게 될 수모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를 무너뜨릴 방법도, 그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정희..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과거와 현재, 진짜와 가짜, 폭력과 자유의 경계 위에서, 결정을 해야 한다. 리처드에게서 암호 같은 메시지가 왔다.

‘캐서린의 생일날. 수영장.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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