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다트무어 도로변에서 사람으로 추정되는 유골 발견… 전문가 ‘동양인 여성, 2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여”
영국 남서부 다트무어 진입로 인근 도로변에서 잘려 나간 사람의 뼛조각이 발견돼 인근 주민들이 충격에 빠졌다. 며칠째 이어진 폭우로 흙이 쓸려나가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조각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는 “자연적으로 부러진 흔적이 아닌, 사람에 의해 절단된 자국”이라고 밝혔다. 초기 부검 감식 결과, 뼈는 동양인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며 매장된 지 2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현재 신원을 특정할 단서는 부족하지만, 과거 실종된 여성들의 기록과 대조 중”이라고 전했다.
현장에는 플리머스대 범죄심리학 박사인 세연 심슨(35) 씨가 합류해 유골의 매장 패턴과 주변 환경을 분석 중이다.
심슨 박사는 “뼈의 손상과 노출 각도로 볼 때 단순 유기보다는 은폐를 목적으로 한 매장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데번, 2025년 10월 19일 | 더 선 <The Sun> 로라 콜린스]
신문 속 기사를 읽는 동안 손끝이 떨렸다. 문득, 한 달 전 사라진 리처드가 떠올랐다.
혹시 동네 살인범에 의해 살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
애자 언니 말처럼 요트 여행을 간 걸까.
그날 밤, 바다를 바라보던 네 명의 여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을 노트에 적어 내려가며, 나는 리처드와의 첫 만남을 되돌아보았다.
4개월 전, 해안 도로를 따라 늘어선 집 중 가장 작은 집인 <바다가 보이는 집>을 방문 후 망설임 없이 계약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아색 벽과 새하얀 주방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사는 집처럼 먼지 하나 없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마음에 든 공간은 거실이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 바다와 그 건너편의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침마다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20년간 일했던 회계사 일을 그만둔 직후였다. 쉰 살, 조금은 이른 정년이었다. 남편 이안은 여전히 런던의 통신회사 BT 그룹에서 재무 이사로 일하고 있었고, 런던의 집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퇴직과 동시에 토키 여행 후, 바로 이사를 결정했다. 이안은 신중하게 결정할 일을 상의 없이 해버린 나에게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당장 계약 안 하면 다른 사람한테 금방 팔릴 집이라니까”
나의 설득에도 그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럼 다른 집 알아보면 되지, 급하게 내려갈 이유가 뭐가 있어?”
1년 동안 주말부부로 지내는 걸로 다툼은 일단락됐다.
정원으로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 너머로 다른 집 담장이 보였다. 우리 집에서 두 블록 걸어가면 안을 볼 수 없는 요새 같은 집이 있었다. 정원 입구에 ‘애플 트리 하우스’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다. 커피를 들고 정원에 나가 가구 배치에 대해 구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제주도의 집처럼 낮은 담장이 있었고 정문은 안으로 걸쇠가 걸려 있었지만 밀면 열렸다. 아무나 정원으로 들어와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불쑥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운동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흰색 러닝화를 신고, 손목에는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있었다. 달리기를 막 끝냈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깔끔한 수염과 차분한 미소가 어울렸다. 세련된 그의 모습에 그가 무단으로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네, 안녕하세요? 근처에 사시나 봐요?” 그의 운동복을 보고 지레짐작하여 물어보았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저기 보이는 애플트리 하우스에 살아요. 전 주인과 친해서 가끔 왔었는데, 누가 이사 왔는지 궁금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여기 정원에서 보는 우리 집이 가장 예쁘거든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집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선한 사람 같았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런던과 달리 그가 먼저 말을 건넸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머, 언제든지 오셔서 집 보고 가세요.”
“그래도 될까요? 사실 이 해안도로를 따라 이름 붙은 집들은 우리 회사에서 리모델링해 판매한 거예요. 엄밀히 따지면 친구가 살던 집은 아니죠.”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불쑥 이야기했다.
“저는 이유진이에요.”
“저는 리처드 데이비슨이에요. 사람들은 줄여서 리치라고 부르죠.”
“어머, 이름이 엄청 부자일 것 같아요.”
생각 없이 주책스러운 말이 나와 겸연쩍게 웃었다. 그는 슬쩍 내 왼손 약지를 쳐다보았다.
“신랑은 아직 정리할 것이 남아 런던에 있어요. 주말에 올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남의 집에 불쑥 들어온 불청객이었데 호감형 외모만 보고 단숨에 마음을 열어 버렸다.
탁자 위의 그의 은 커프 링크스가 현실을 일깨웠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지만 상념에 빠져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아침에 내린 커피는 이미 식어버려 아이스커피가 됐다. 리처드가 사라진 것과 한 달 후 발견된 동양 여성의 유골. 요즘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자꾸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세연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사 중인 사항을 얘기해 줄 리 만무했다. 오랫동안 KBS 기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BBC 한국 데스크로 옮긴 수민에게 전화했다. 정보에 밝은 그녀라면 나의 궁금증을 조금 해소해 줄지도 모른다. 퇴직 이야기를 핑계 삼아, 사건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오늘 다트무어에서 시신 발견 된 거 혹시 알고 있어? 얼마나 오래된 시신일까? 남성일 가능성은 없을까? 동양인 여성이라 했는데 혹시 한국인 여성일 가능성은?” 쏟아지는 질문에 수민이 나를 멈춰 세웠다.
“언니, 천천히 이야기해 봐. 다트무어에서 발견된 시신은 어느 신문에 실린 거야? 우리 방송에는 제보가 아직 없는데. 한번 조사해 보고 알려줄게.” 기자의 촉이 발동한 건지 그녀는 관심 있어했다.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한국 사람이라는데? 한국 이름 강애정. 여기서는 캐서린 데이비슨. 영국 시민권 받을 때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네. 한국 대사관에서 가족을 수소문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한국에는 가족이 없는 것 같아.”
“한국 사람이 왜 이 인적 드문 곳에서 묻혀 있었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팀도 데본으로 내일 내려갈 것 같아. ” 분주한 소리가 나는 것 보니 아직 일하는 중인 듯했다. “내려오면 한 번 보자. 그리고 통역 필요하면 이야기해” 궁금한 건 많았지만 바쁜 사람을 더 붙잡을 수 없어 급하게 통화를 끊었다.
캐서린 데이비슨.. 그녀가 궁금했다.
영국에는 무슨 일로 왔을까. 일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결혼한 이주 여성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