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사자 형상이 양쪽 문 위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검은색 철제 대문은 영국 근위병처럼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문을 지나자 은은한 조명이 켜진 길이 나타났고, 양쪽으로는 대형 화분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 맞춰 서 있었다.
'애플 트리하우스’라는 이름답게 정원 한쪽에는 커다란 사과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붉고 윤이 나는 열매들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잔디는 방금 손질한 듯 가지런했고, 중앙의 작은 분수에서는 물방울이 미세한 리듬을 만들며 떨어졌다.
길의 끝에 있는 고동색 오크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고 조 말론 디퓨저 향기가 풍겼다. 고풍스러운 벽난로 위로 19세기의 유화가 걸려 있었고 골동품들이 고가구 위로 전시되듯 놓여 있었다. 너무 완벽해 보여 가짜처럼 보이는 세계 같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런던 중저가 매장 Hobb에서 산 히아신스가 수놓아진 연 핑크색 민소매 드레스가 이곳의 화려함에 눌려 초라해 보였다.
‘금빛 장식이라도 달고 와야 했나?’
애써 씩씩해 보이려 중얼거렸다.
토키(Torquay)로 이사 오자마자 만난 첫 번째 커플인 리처드와 캐서린으로부터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낯선 땅에서 한국말 한마디가 주는 친밀함이 있다. 그래서 캐서린의 초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친구 사이보다는 멀고, 아는 사이보다는 가까운 그녀의 초대에 응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캐서린의 오십 번째 생일이다. 손님은 오십 명. 그중 한국인은 다섯.
무속에서는 숫자 오가 완벽함을 뜻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숫자를 맞춘 걸까. 그녀는 이 파티가 완벽하게 끝나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건 애자였다.
남편 이안이 좋아하는 초콜릿 가게 <호텔 쇼콜라>의 주인이다.
그녀는 예술 대학 출신답게, 언제나 옷차림에 감각이 있었다. 오늘도 빨간 구두에 랩스커트를 두른 모습은, 집주인보다 더 주인 같았다.
그녀 옆에는 세연이 있었다. 플리머스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 언제나 침착하고, 말보다 눈빛으로 상대를 읽는 사람이었다.
세연은 이름하여 KSS(Korean secret society)라는 내가 만든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작은 마을에서 한국인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올린 온라인 글에, 세연이 연락했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건,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는 뜻이에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비해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죠”
그 말에 이끌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한국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가끔은 서로의 외로움을 나눴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지은. 한국인으로 유일한 남작 부인. 내가 살던 동네의 이튼 스쿨 최대의 기부자였다. 그녀는 오늘의 손님 중 가장 빛났다. 금빛 드레스을 입고 웃는 건지 아닌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젠가 기사에서 본 그녀의 남작 부인이 된 러브 스토리를 글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뒤따르는 의전 비서와 경호원들이 그녀가 머무는 세계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과일로 장식된 3단 케이크와 핑거 푸드 사이를 오가며 샴페인을 권하는 도우미들이 보였다. 고용된 사진작가는 다양한 장면을 찍고 있었다. 연회장의 오른쪽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너머로 은빛 조명이 번졌고 그곳에는 건물 뒤편에 숨겨진 수영장이 있었다. 대형 유리 미닫이문 너머로 이어진 수영장은 고급 리조트의 한 장면 같았다.
매끄럽게 빛나는 고급 대리석 타일은 밤이라 그런지 더욱 서늘해 보였다. 전동 커튼이 열리면 수영장은 곧바로 야외 데크로 이어지고, 그 끝에는 해변으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이 있었다.
바닷바람의 향이 아주 희미하게, 샴페인 향 사이로 섞여 들어왔다.
‘이곳에서라면 글이 저절로 써지겠는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이게 누구야, 이웃집 작가 씨잖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리처드였다. 이미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의 걸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내 이름 대신 언제나 “작가 씨”라고 불렀다.
“집은 맘에 들어요? 리모델링에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의 복장은, 이 집의 주인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맞춤 재단사의 손길이 느껴지는 턱시도, 벨벳 소재의 나비넥타이, 재킷은 그의 어깨선을 완벽하게 감싸며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을 만들었다. 손목에는 롤렉스, 가슴에는 포켓스퀘어, 소매 끝에는 작지만, 정교한 은빛 커프 링크스(cuff links*)가 반짝였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광택 있는 옥스퍼드 슈즈까지 그는 하나의 완성된 초상화처럼 서 있었다.
“작가 씨, 작품은 언제 나와요?”
그가 웃으며 샴페인 잔을 건넸다.
나는 잔을 받으며 미소 지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이 단순한 취객의 시선이 아니었다.
끝날 줄 모르던 파티도 어느새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 때문인지 시간이 유독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 샴페인의 향이 잠잠해졌다.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나는 힐을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정원의 불빛이 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집으로 걸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모든 불빛이 꺼졌다. 순식간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릴 것 같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낮게 깔린 엔진음이 들려왔다. 바다 어딘가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요트 소리였다.
반쯤 취해 있던 애자 언니가 걱정되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울리고 언니는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며 어둠 속 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언니랑 같이 나올걸…’
후회가 밀려왔다.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가자.’
문을 밀자, 희미한 촛불들이 보였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빛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바다와 연결된 계단 위에 파티 내내 보이지 않던 캐서린을 포함한 네 명의 한국인이 서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실루엣으로 유추해 볼 때 왼쪽부터 애자, 세연, 지은, 캐서린, 그들은 말없이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숨소리도 조심스러웠다. 리처드는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공기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떠돌았다.
언니에게 다가가려 할 때 무언가 반짝였다.
리처드의 은빛 커프 링크스 한쪽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나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리처드가 사라졌다.
* 커프 링크스(cuff links*): 드레스 셔츠의 소매에 일반 단추 대신 쓰이는 장식 단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