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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

<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by 은주

“언니. 잘 지냈죠?”

유진은 다트 무어로 내려온 수민을 만나러 왔다. 수민은 그녀의 손에 들려진 들꽃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리라. 이 먼 곳까지 와서 타국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갔을 그녀가 안타까워 꽃 한 송이 놓아주고 싶었다. 죽어서도 갈 곳 없었던 그녀의 삶이 이주 여성의 인생 같기도 했다.


뼛조각이 발견된 장소는 폴리스 라인이 쳐 있었고 그 옆은 그녀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놓고 간 꽃다발들로 가득했다. 모두 비슷한 감정이었으리라.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었을 때 처음으로 모르는 누군가 위해 꽃다발을 쌌다. 영국의 추모방식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감정을 갖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꽃다발을 놓고 일어서는데 폴리스 라인 한쪽 끝자락에 세연이 울고 있었다.

“ 유진 언니.. 어떻게 왔어요?” 유진을 발견한 세연이 당황하여 얼른 눈물을 닦았다.

수민이 방금 알려 준 사실을 말해야 하나 조금 망설이다가 아직은 때가 아닌듯해 그녀의 눈물을 모르는 척했다.

“ 여기 취재 기자가 내 후배야. 홍수민이라고 BBC에서 일해”

다음 말을 잊지 못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세연이 일하러 간다고 자리를 떴다. 잠시 자리에 서서 세연의 뒷모습을 보며 방금 전해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캐서린을 만나야 한다. 아니 그전에 남작 부인에게 먼저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남작 부인의 집무실.

탁자 위에는 리처드에게서 넘겨받은 자료들이 놓여있었다. 이 서류들을 도대체 어디서 모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서류가 벌레라도 되는 양 손가락 끝으로 건들어 보았다. 그때 비서가 들어와서 유진의 방문을 알렸다. 급하게 서류를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애플트리 저택에서 발견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고 했다. 지은의 손 떨림이 비서도 눈치챘는지 의아한 눈으로 지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급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유진이 왜 방문한 걸까? 캐서린 집에서 무엇을 발견한 걸까? 혹시 리처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

유진이 거실로 들어서며 미소를 머금고 인사하자 지은의 긴장된 마음이 좀 풀리는 듯했다.

유진은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지은의 꽃무늬가 새겨진 얇은 실크 스카프를 바라보았다. 지은은 외부인을 상대할 때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친절해 보이면서 선을 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같은 미소였다. 작고 단정한 진주 귀걸이는 그녀의 검소한 평소 생활을 말해주는 듯했다. 60이라는 나이가 주는 우아한 기품이 흘러나왔고, 눈가와 입가에 남아 있는 섬세한 선들은 젊은 시절 얼마나 예뻤을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파티장에서 만났을 때 가볍게 인사만 하던 사이라 약속하지 않은 이 방문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서가 차를 내주고 나가자, 유진이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방문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한국인인데 모르는 척하기 쉽지 않죠. 다른 선약이 있어서 오래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이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이야기했다.

“리처드와 애자 언니가 한 달 전부터 사라졌어요. 그런데 캐서린이나 세연 씨나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아요. 세연 씨는 연락이 안 되고….”

방금 세연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음을 설명하지 않았다.

“리처드나 애자 씨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저보다는 캐서린에게 가보지 그러세요?”

지은은 태연한 척 차를 마셨다.

“그러려고 했는데…. 어제 초콜릿 가게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애쉬본 남작 부인에게 먼저 확인해 보려고요”

약간의 시간을 두고 주머니에서 곱게 쌓아둔 리처드의 커프 링크스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뭐죠?”

“리처드가 사라지던 날 소매에 달고 있던 커프 링크스의 한쪽이에요. 수영장 주변에서 주웠어요.”

유진은 탐색하듯 지은의 표정을 살피며 훅 물어보았다.

“리처드와 알고 지내던 관계라도 들었어요”

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남작 부인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지며 창백해졌다. 유진은 답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수영장에서의 다툼이 리처드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잠시 망설이다가 단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남작 부인이 대답했다.

“다툰 건 사실이에요. 다툰 이유는 대답하지 않겠어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리처드는 요트 여행을 간다고 했어요. 캐서린에게 나머지는 확인해 보세요”

리처드의 그 늦은 밤의 요트 여행이 그녀에게 알리바이라도 되듯이 다급히 덧붙였다.


지은은 시계를 쳐다보며 그만 나가달라는 무언의 표시를 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날 캐서린, 남작 부인, 세연 씨, 애자 언니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거죠?”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진은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다.

캐서린은 왜 리처드를 신고하지 않았을까?

“저도 한 가지만 물어보죠. 리처드가 사라진 것에 대해 왜 집착하는 거죠?. 오늘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오늘의 방문이 맘에 들지 않았으리라.

“캐서린 데이비슨.” 말을 약간 멈추었다가 말했다.

“낯익은 이름이죠? 다트무어 근방에 발견된 뼛조각은 알고 계실 거예요. 한국인 여성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 이름은 강애정 씨예요."

잠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족이 없는 무연고 시신이래요.”

그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지만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유진이 나간 후 지은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미국 월스트리트 바에서 리처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니 영국에서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왜 하필 남작의 본가가 있는 바닷가 마을에 그가 살고 있었던 것일까?

그를 만난 건 남작을 만나기 6개월 전 월 스트릿 바였다.


그가 그녀와 데이트한 건 캐서린과 결혼 생활 중이었다. 그는 전 부인과 사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슬픈 척 연기한 것이다. 연애를 한 것이 아닌 바람을 피운 것이다.

깔끔한 정장에 눈길이 가는 외모였다. 그는 익숙한 듯 바를 훑어보았고 지은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은 역시 미묘하게 몸의 각도를 조정하며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포착되도록 했다. 짧은 눈빛 교환만으로 서로를 평가했다.

“혼자 계시네요.”

그가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 영국인 특유의 악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지은은 잔을 살짝 돌리며 미소를 지었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눈길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사별했고, 사업차 미국에 왔다고 조심스레 설명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신뢰감을 주었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매일 바에 방문했고 그녀는 그의 호텔로 퇴근했다. 그는 부인이 병으로 사망한 이야기를 슬픈 눈으로 전했고, 그녀도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감춰 두었던 상처를 조금씩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영혼의 짝을 만난 듯했다.


그녀가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영국으로 이주 계획을 세우며 설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청혼 대신 말도 없이 영국으로 돌아갔다. 연락이 되지 않아 그가 머물고 있던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호텔로 찾아가 보았지만, 체크아웃을 한 후였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과 얼굴 외에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는 그저 잠시 즐기는 유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로 간신히 보통 사람의 삶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혼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병원을 나서니 참고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다시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그가 그녀의 과거로 발목을 잡으려 했다. 그는 그녀의 미국인 전남편을 찾아가 뒷조사하고 인연을 끊고 지낸 동생들을 만나 과거를 캐어냈다. 나를 유혹했듯이 반듯한 얼굴로 나와 친분이 있는 척 연기했을 것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악인은 선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리처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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