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 10차를 통과하며
한 시기에 걱정할 수 있는 총량이 있는 걸까? 시험관 10차를 통과하면서 일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래서인지 과배란 10번 중 처음으로 심리적으로 밀리지 않고 한 차수를 끝냈다. 장하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다. 역시 난임생활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였다. 어려운 일이지만.
다음 생리가 시작해서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이른 시각에도 대기실엔 앉을자리가 없었다. 이제 도착해서 접수를 하고 진료비 수납을 하고 주사기를 넣은 보냉백을 챙겨 바쁘게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기했다. 화면에 내 이름이 나온 것을 못 보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간호사 님이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졸다가 걸린 학생처럼 벌떡 일어나서 대답했다. “네에.”
주치의 선생님은 잘 왔냐는 인사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10차의 결과. 5일 배양 배아가 3개나 나왔다고 했다. 놀라서 큰소리가 나왔다. “네? 3개요?” (10번 시술을 하면서 5일 배양 배아는 총 7개를 만났거든요. 한 번에 3개면 놀랄만하지요?) 하지만, 이러다 절망하지 싶어 바로 희망을 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3개 중에 2개는 비정상이었고, 1개는 이식이 가능합니다. “ 착상전유 전검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배아에 염색체 이상 유무가 있는지 알아보는 스크리닝 검사입니다.) “당장은 양쪽 난소가 과하게 부어있는 상태라 이식은 어렵고.... 다음 생리하면 상황을 봅시다.” 이 말을 듣고 검사 결과지 한 장을 받아 들고 진료실을 나왔다. 맨날 꽝을 뽑다가 처음으로 꽝 아닌 것이 나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이식하러 병원에 간 것은 12월 초였다. 병원 가려고 패딩을 입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걱정을 말했다. “동결 배아는 해동할 때 문제가 자주 생긴대. 오늘 이식 못하고 집에 올 수도 있어.”
다행히 아무도 집에 가라고 하지 않고 대신 침상에 누우라고 했다. 누운 채로 이식할 시술실로 이동했다. 시술실은 이미 파한 곳처럼 깜깜했는데 모니터 한 대만 밝았다.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바로 모니터에 오늘 이식할 배아 사진이 떴다. 걱정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해동을 이겨낸 배아가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이식하는 동안 누워서 그 배아를 계속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임신을 위해, 저 배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구나. 답은 벌써 저 안에 다 들어있겠다. 임신일지 아닐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없을지.
임신 여부 피검사 하루 전이었다. 새벽 4시 남편 몰래 임신 테스트기를 뜯었다. 진하게 한 줄. 그럼 그렇지. 쓴맛을 삼키며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는데 곁눈으로 아주 아주 연하게 한 줄이 더 보이는 것 같았다. 그새 남편도 일어나서 내 손에서 테스트기를 뺏더니, 나랑 똑같은 반응.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어라? 초조한 마음에 시달리다 다음 날 새벽이 되었다. 미리 준비해 둔 3개의 테스트기가 총 6줄을 보여주며 임신이라고 합창했다.
임신했다고 마음을 놓을 초보가 아니다. 이미 12주에 유산을 경험한 남편과 나는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떨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 둘도 임신했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2-3주마다 병원에 갈 때는 더 불안해서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해 떠들었다. 언제든 종료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기뻐할 수도 없었고 언급하는 것 마저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진료일에 초음파로 심장이 뛰는 것을 보고 오면 그래도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 안심은 빠른 속도로 풍화해서 일주일이면 다 사라지고, 다음 진료까지 또 몇 주를 손톱을 물어뜯고, 잠을 설치며 지냈다.
매번 초음파를 볼 때마다 다행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임신 10주가 되자 난임병원에서 그만 오라고 했다. 졸업이라고, 이제 산과로 가라고. 다음은 기형아검사인데 여기서는 못한다고. 집 이외 가장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이제 오지 말라니 얼떨떨했다. 평소 마음을 나누던 주사실 선생님들과 길게 안부를 나눴다. 기쁜 일이지만 아쉬운 마음도 있어서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이렇게 다중적이구나 싶었다. 출산하면 꼭 연락하겠다고 약속하며 병원을 나왔다.
유산했던 임신 주차가 되어 1차 기형아검사를 받으러 산과를 방문했다. 당연히 만삭의 임신부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에서, 주차장에서. 3년 가까운 난임기간 내내 임신부에게 가졌던 적대감이 여전히 남아있어 큰 배를 가진 여자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감정이 일었다 앉았다. 검사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버렸다. 태아 목덜미 투명대도 정상이라고 했다.(지난번 임신에는 이 검사에서 이상소견이 발견되어 유산을 해서 이때 긴장을 과도하게 했어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나왔다. 갑자기 눈물이 발작처럼 쏟아졌다. 운전대를 잡고 차 안을 소리로 가득 채우며 엉엉 울었다. 처음 느껴보는 눈물이었다. 안도의 눈물. 그제야 임신하고 12주 동안 별일 없는 것처럼 살았지만,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안도라는 감정을 몇 년 만에 느꼈다. 그렇게 소원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중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나는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좋은 일은 남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다고 여겼다.
임신하면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자고 일어나 배를 문지르며 평화로운 아침을 맞는 임신부를 꿈꿨다. 그런데 평화를 전연 느낄 수가 없었다. 기분이라는 게 관성이 꽤 센 것 같았다. 전쟁지대를 벗어나 안전한 본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이 여전히 과도한 긴장 속에서 산다는 기사를 본 것도 생각났다. 평화로움은 그렇게 일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 평화를 느낄 수 있겠지. 그날이 자연스럽게 도착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랬다.